늦은 밤, 큰딸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ㅡ 아빠.
ㅡ 어.
ㅡ 살면서 힘들 때면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해?
이놈, 아빠 닮은 이놈이,
자기 속 파먹는 사마귀 같은 이놈이 나름 힘든가 봅니다.
ㅡ 인생을 낭비한 죗값이라고 생각하지.
ㅡ 음... 그럴듯하네...
ㅡ 정화야.
ㅡ 응?
ㅡ 하지만, 그 생각엔 함정도 있어.
ㅡ 어떤 함정?
ㅡ 내 탓ᆞ팔자ᆞ운명 이딴 거는 자칫 패배론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어.
ㅡ 노예근성 같은 거?
ㅡ 외부의 잘못도 자기 탓으로 흡수해버리지.
ㅡ 음... 그럴듯하네...
ㅡ 그게 반복되면,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돼.
ㅡ 인지부조화?
ㅡ 극복할 수 없는 대상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거지.
ㅡ 자기변명 같은 거야?
ㅡ 그래. 자기위안 같은 거.
ㅡ 음... 급소를 찔린 거 같다...
ㅡ 악에 대해,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저항하길 포기하는 거지.
ㅡ 그런 사람들이 많아?
ㅡ 엄청! 달관했다고 극복했다고 착각하지.
ㅡ 우리 교수님이 그래!
ㅡ 정화야.
ㅡ 응?
ㅡ 깊어지고 넓어지고 싶지?
ㅡ 절실하게 그래.
ㅡ 그럼, 극복해 봐. 혼자 가는 거야.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아.
ㅡ 갑자기 외로워져.
ㅡ 그 외로움조차 극복해야 자유로워져.
ㅡ 명확하진 않지만, 느낌이 와.
ㅡ 나는 정화가 살불살조하고 살부살모해서 피안의 세계로 가길 바래.
ㅡ 뭐래?
ㅡ 결혼 따위는 하지 말라는 말이야. 좋은 말은 적어라, 쫌!
ㅡ 그래~. 아빠, 고마워. 웹툰 스토리 하나 얻었다~.
애니메이션을 하다 만화로 진로를 바꾼 녀석은 스토리가 궁할 때마다 제게 전화를 합니다.
딸이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밀봉해 놓았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 내 욕망의 극단까지 갔었던 이야기.
백 명이 넘는 여자를 자빠뜨리고서야 만나게 되었던 그것.
해탈이 아니라 허탈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책임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