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토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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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은 남의 창작물 내용의 일부를 마치 제 것인 양 취하여 이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剽나 竊은 모두 도둑질하다, 훔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도명기세(盜名欺世)란 말이 있다.
이름을 훔쳐 세상을 속인다는 뜻이다.
표절은 남의 것을 훔쳤다 하지만,
실인즉 남의 이름을 훔친 것과 다름이 없다.
이로써 제 이름, 명예를 사고,
다른 이의 명성에 흠을 끼치고,
급기야 세상 사람을 모두 속이는데 이른다.
이리 볼 때, 표절은 간단치 않은 허물을 짓는 일이라 하겠다.
오늘날엔 저작권법을 만들어,
이에 따른 제 법률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규율한다.
명예권뿐이 아니라, 특히 재산권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관심과 법률적 개입 강도가 강해지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비를 정확히 가리려 함인가?
여기 이슈 토론방 글 중에 내 글을 통으로 베낀 것이 하나 있다.
그는 내 글을 예전에도 그리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이번에 이에 대하여 지적을 하고 시정을 구하였으나,
이제껏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여 만부득 여기에 밝혀 두는 바이다.
달구지씨 前上書 (촛불과 태극기)
http://www.wolchuck.co.kr/bbs/bbs/board.php?bo_table=issue&wr_id=50354
참고로 이 글의 원문은 나의 블로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촛불과 태극기
http://bongta.tistory.com/1768
이제 이에 대한 소회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간단히 피력하고자 한다.
나는 내 글에 마우스 드래그, 또는 우(右) 클릭 금지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는 글 절취(截取)를 막는 짓이 남우새스러운 짓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치를 취한다한들 일단 모니터 상에 나타난 것은,
사용자 단말 측에 그 흔적이 남는다.
이런 것을 취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 된다.
그러함이니, 저런 따위의 짓은 공연한 도로(徒勞)임을 알아야 한다.
실제 아무리 교묘한 조치를 해두었다한들,
그게 내겐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다.
필요만 따른다면 나는 이미지 내용도 얼마든지 텍스트로 바꿀 수 있다.
한편,
내가 쓴 글이라 한들 그게 온전히 내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수많은 선인(先人)과 동시대의 현자(賢者)들의 훈김(薰氣)을 쬐이지 않은 것이 있겠음인가?
공자(孔子)는 예악의 근원으로서 주공(周公)을 두고, 사모하여 모셨다.
子曰:「甚矣吾衰也!久矣吾不復夢見周公。」
(論語)
“공자 왈, ‘심하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 되었구나, 내가 주공을 꿈에 다시 보지 못한 것이.’”
사모함이 깊기가 이만 하랴?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자신이 쇠약함에 빗대고 있다.
이러하자, 묵가(墨家)는 주공보다 앞선 우(禹)를 앞세우며,
권위를 사며 제 사상을 폈다.
그러자, 이번엔 맹자는 우보다 앞선 요순(堯舜)을 끌어들여 앞세웠다.
나중에 도가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황제(黃帝)에 가탁(假託)하였다.
이리 자신들의 사상에 권위를 외부 성왕에서 구하는 일을,
가상설(加上說)이라 한다.
이러하듯 진리를 외부의 권위에 두는 일은,
인도 논리학 즉 인명학(因明學)의 정교량(正教量)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겸손함의 외표(外表)로 볼 수도 있지만,
유가의 경우, 다음과 같이 술이부작의 태도에 기인한다.
子曰:「述而不作,信而好古,竊比於我老彭。」
(論語 述而)
(※ 老彭 : 商朝賢大夫, 好述古事)
“공자 왈, 선인들의 지식을 전수하지만 새로 짓지는 않는다.
선인의 가르침을 믿고, 옛 것(책)을 좋아한다.
과시 나는 상(商)나라의 대부 노팽(老彭)에 비견된다 하겠다.”
이렇듯, 술이부작이란 자신이 사상이나 지식을 창신(創新)하지 않고,
다만, 선성선현(先聖先賢)의 가르침을 그저 전술(傳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당세(當世) 자기가 가르침을 펴는 일을 자임하고 있다는 기개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말씀 앞에 서면, 공자의 그 떳떳함, 당당한 태도를 느끼게 된다.
각설하고,
공자와 같은 성인이 아니고, 이제 내 글에 대하여 말한다.
기실 천하의 글은 천하인이 주인인 것.
나 역시 다른 훌륭한 분들의 훈김으로 글을 써나아가고 있을 뿐인 것을.
내 글이라는 것, 다만 내 이름을 앞세웠을 뿐,
혹간 터럭 한 오라기 내 생각이고, 나머지는 다 남에게 신세를 지고 있음이다.
내 글은 밖으로 나아간 이상 이미 내 것이 아니다.
허공중에 바람 타고 나르는 날개처럼, 물을 따르는 외로운 돛단배와 같이
쉬이 지나가는 인연의 터럭 실줄인 것.
우리가 말을 밖으로 내놓으면 "옴마니반메훔" 알파와 오메가
그 소리의 영혼이 가없는 우주를 끝없이 떨며(振動) 나아간다.
그런즉 그 끝줄을 움켜지고 내 것이라 우김은 얼마나 구차한 노릇이겠는가?
난 내 글이 sourcer는커녕 connector로서도 아닌,
그저 평범한, 처처(處處)에 質料化, 無化되기를 소망한다.
그러함인데도,
내 글을 도용한 곳 앞에 서서 나는 왜 서성거리고 있는가?
혹가다 어떤 이들의 블로그를 보면,
기천(幾千)가지 글이 올려져 있다.
하지만, 남의 글을 통으로 옮겨두고 자신의 이름을 걸어 두었다면,
이것은 과연 옳은 처사인가?
제 글은 하나도 없이,
다만 남의 글로써 무엇을 도모하고자 함인가?
많은 책을 기증하겠다는 것을 앞에 두고, 이를 극구 사양한 분이 계시다.
책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 책 주인의 안목과 기도(企圖), 소구(所求)로 모아진 것임이니,
그것은 그의 인생을 규정하는 이력일 뿐,
하나의 장부로서, 내 자신의 가는 길과는 다르다.
이를 탐할 일이 어디에 있으랴?
계집아이처럼 소꿉장난하듯,
기천 아냐 기만을 모아둔들 다 허깨비 그림자 노름이다.
남의 글을 제 이름으로 모아둔다는 일은.
허나, 남의 글을 질료(質料)로써 내 글에 가지런히 복속시키는 것은 무엇을 탓하랴?
가령 건축가가 집을 짓고 나서 정초(定礎)에 제 이름을 새겼다 하자.
비록 그 건축물의 벽돌, 서까래, 기와가 남이 만든 것이라 한들,
그 집 건축가가 벽돌쟁이 이름을 훔쳤다 할 수는 없다.
건축가란 무엇인가 ?
그에겐 설계 컨셉과, 철학, 소망이 있다.
이는 그의 가슴과 머리에 들어 있다.
하지만, 구체적 현실에선 건축 자료를 얽어 건축물로 구현할 수밖에 없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장엄한 건축물을 대한다.
아무리 하찮은 건물이라도 그의 소망이 녹아 있고
철학이 숨어 있다.
내 몸뚱아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살이니 뼈니 모두 타자의 명을 빼앗아 만들지 않던가?
그러하고도 제 이름을 가슴에 자랑스러이 붙인다.
왜 그런가?
이는 유일자인, 내 청정 영혼의 부름이 시킨 일이기 때문이다.
술이부작 공자처럼 오연(傲然)하니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허나, 저들처럼,
제 생각 하나 일으키지 못하고,
남의 집에 제 문패를 달아둔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 있으랴?
실로, 가여운 노릇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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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을 본 듯 하네요.
글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