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살에 관한 / Monologue

IP : 4d6b1b7728c0fa3 날짜 : 조회 : 2944 본문+댓글추천 : 0



그날은 보급 담당이며 이경(이병)인 내가 전투화를 지급한 다음 날이었어. 고참들이 전투화를 전부 반납했는데, 목이 너무 길고 코가 못생겼다는 게 이유였지. 빨간 매직으로 소속과 이름까지 적어 놓고는(디자인 감각이 무시된 커다란 글씨라니!), 잘생긴 놈으로 다시 지급하지 않으면 군대 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공갈 협박을 접수한 날이었지. 나는 작은 리어카에 서른 켤레가 넘는 전투화를 싣고 연병장을 지나갔어. 고참들은 사각팬티 차림으로 족구나 테니스를, 빨간 체육복의 촌스러운 동기들은 논과 밭에서 공을 물어오면서 "김수경(병장)님, 화이링!!!" 아부에 열중이던 일요일 오전이었지. 오월의 햇살이 고참의 벌거벗은 등에서, 졸병의 꼬질꼬질 땀나는 이마에서, 흙먼지 날리는 연병장에서, 무기고의 차가운 철책과 아직도 겨울인 내 마음에서 유리처럼 부서지던 날이었어. 보급창고를 열고, 전투화를 옮기고, 신나와 융(전투화를 닦는 천이야.)을 챙기던 나는 문득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쥐들이 쌀을 훔치고, 쌀을 지키기 위해 고참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지. 고참은 보급창고를 내게 인계하던 날, 살이 쪄서 디룩디룩한 놈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새 주인이야. 쫄따구라서 조또 모르겠지만, 니가 잘 갈카 줘라." 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순간 고참의 뺀질한 눈빛과 놈의 야비한 눈빛이 동류라고 생각했어. 부대원들이 작전을 위해 출동하는 날이면 언제나 고참은 보급창고를 열었는데, 부식차 가득 쌀 포대를 옮기면서도 나는 그 이유를 몰랐지. 고참은 부대원들이 귀대하기 전에 돌아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꽁치 통조림을 놈에게 먹여주곤 했어. "니, 아버지가 경찰이랬나? 니도 데모하다 끌려왔나? 니, 우리 부대원 중 80%가 운동하다 잡혀 온 거 아나? 오늘 출동도 니 친구들 데모하는 거 막으러 간 거 아나?" 중졸 학력이 콤플렉스인 고참은 전직이 대학생이었던 내게 모교의, 그것도 선후배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부대원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곤 했는데, 나는 그럴 때면 입을 다물었고, 그러면 고참은 늘 내게 원산폭격을 시키곤 했지. 고양이의 목덜미를 만지면서, 고양이처럼 권태로운 하품을 하면서. 왜 궁금하지도 않은 고양이와 고참을 이야기하느냐고? 자살에 대해 묻지 않았어? 그가 죽었어. 보급창고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했지. 내무부에서 감사가 나왔고, 그가 3년 동안 한 온갖 횡령이 드러났어. 그가 제대를 보름 남긴 한 달 전이었지. 영창을 가게 된 그는 그날 밤, 보급창고로 나를 부르더군. 무기고 뒤편으로 사라지는 동네 슈퍼의 미숙이를 모른 체한 나는, 고양이를 안고 쌀 포대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고참을 내려다봤지. 이미 취한 그는 전통이, 이 부대의 전통이 그렇다고. 자기가 쌀을 내다 팔고 전투복이나 전투화, 심지어 특식으로 배당된 소나 돼지의 마릿수를 조작한 건 시켜서 한 짓이라고. 자기가 아파트를 사 준 대장이 3명이라고. 반장이나 소대장들도 다 같이 먹었는데, 그들은 벌써 딴 부대로 전출을 갔고 증거는 없다고. 미숙이가 임신을 했고, 제대해서 미숙이와 결혼해야 하는데 영창을 가면 어떡하느냐고. 그러니 네 아버지께 말 좀 해 달라고. 지금 대장이 네 아버지 후배라면 자기를 봐 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참을 보고만 있었는데, 고참은 처음으로 내게 원산폭격 명령을 하달하지 않았지. 다음날, 보급창고 문을 열던 나는 고참의 주검을 보게 돼. 나는 놀라지 않았어. 왜냐면 이미 예감했던 일이었거든. 차츰 어둠에 익숙해진 나는 고참의 손가락에서 처음 보는 반지를 발견하지. 미숙이와의 징표일 것이고 유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참의 호주머니에 손을 대던 나는 고참의 머리 위에서 파랗게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를 보게 돼. 늙은 고양이가 고참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더군. 놈은 내게 고참의 몸에 손을 대면 덤비겠다고 경고를 보내고 있었지. 나는 한참을 놈과 마주했어. 놈이 나를 읽더군. 놈은 내게 미필적 고의와 자살 방조를 따지고 싶은 걸까? 나는 놈의 눈을 보며 씹듯이 말했어. "니 주인은 하나의 선택을 한 것뿐이야. 절망하지 않기 위해 희망을 버렸고, 산다는 게 죽음보다 두려운 걸 알아버린 거야. 아니, 쉽게 말하자. 순진하게도 세상이 *같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안 거지. 너도 나처럼 니 주인의 선택을 존중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자신의 주인이 되는 걸 막지 않았을 뿐이야. 미숙이 배 속의 아기가 1소대장의 씨라고 말한 게 불만이니? 말하지 말아야 했다고? 바보 같은 그도 사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지. 자살은 그가 선택한 거야. 누구의 강요나 협박 때문이 아니란 거지. 이제 그만 가라. 나는 미숙이가 사건에 휘말리는 걸 막아야겠어. 그게 니 주인이었던 사람이 덜 비참해지는 거야. 그게 현명하지 않겠어?" 형사들 앞에서 나는 최대한 어수룩하게 자백을 했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젠 내 이야기를 하자. 환각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글쎄, 경험이 없는 네가 공감할 수 있을까? 노력은 하겠지만, 그림이 그려지지 않거든 네 상상력의 한계를 증오하기 바라. 또는 네 도덕적 혈통에 건배를! 창고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고참의 영혼이 나를 강간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고양이의 발톱이 내 창자를 가를 것이라는 상상을 한 것은 아니었어. 그런 유치한 생각에 빠지기에는 나는 이미 훨씬 전에 노회했으므로. 그즈음의 나는 어떤 것에도 놀라거나 감탄하지 않을 염세와 권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단지 독한 신나 냄새가 싫었고, 창고가 너무 어두워 전투화의 매직 글씨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은하수를 물고 전투화를 닦기 시작하는데 2소대의 변수경이 지나가더군. 놈은 꼭 오줌을 창고 벽에 갈기고 나팔*이라고 소문난 물건을 자랑스럽게 흔드는 버릇이 있는데, 역시 단세포들의 동선은 변함이 없지. "어이, 스발아! 누구 * 맥일 일 있냐? 빨랑 문 닫고 해라. 소대장 보면 빤빠라다." "신나 냄새가 독해서요..." "이런 스발놈이, 까라면 까야! 스발놈아, 신나에 취하는 게 얼마나 좋은데, 오늘 니가 신나에 째려 *랄을 해도 봐준다. 그니까, 문 닫고 해라. 알았나아?" "예! 알겠습니다!" 문득 그러고 싶어졌어. 제정신이 아닌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어진 거지. 어차피 제정신인 게 견딜 수 없었으니까... 문을 닫고 어둠이 익숙해지길 기다리는데, 문밖에서 변수경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리더군. "니 고참처럼 목을 매진 마라. 흐흐..." 글쎄, 이런 것이 환각의 시작일까? 물질이, 물질의 존재가 이상해졌어. 창고 문을 비집고 들어온 빛줄기에 부유하는 먼지들을 보는데, 아아... 그것들의 함량을 느끼는 거야, 내가. 먼지들이 별들로 변하는데, 아니 원래 별들인 것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라고 나는 믿기 시작했어. 그것은 우주였지. 나는 내가 우주의 고아라는 그동안의 생각을 확신하기 시작했어. 천정을 보고 누웠나 봐. 기껏 4미터 정도가 4억 광년의 거리와 공간으로 변하더군. 나는 서서히 알 수 없는 영역 속으로 몰입했어. 눈을 감고 내 몸을 띄웠다. 어렵지 않았어.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생각만으로 내 몸은 서서히 부양하더군. 공간의 사타구니를 벌리고 우주의 자궁 속으로 침잠하던 나는 무언가 은밀한 움직임을 감지하게 돼. 권태롭게 눈을 뜬 나는, 어둠 속에서, 놈과, 놈의 이빨과, 놈에게 잡힌 쥐, 그 모든 것의 아름다운 떨림을 봤어.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순간이었어... / 이런, 현장에서 호출이 옵니다. 나중에 다시 갑시다. 너무 바빠요... ㅡ,.ㅡ" /



IP : 78d73d715ace889
"니 데모 했나?"

"----------- "

"무슨 무슨 책 읽었노?"

"월간조선,신동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

"뭐-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 "

"------------ "

"일마 이거 완전 빨갱이네. 그런 불온 서적을 다 읽고 "


반강제로 늦게 간 군대.

꽃 피는 군대 생활이 그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ㅎㅎ



이어지는 글 기대 합니다.
추천 0

IP : 377736e0a346b9b
곳곳에 스민 글의 향기에 취해봅니다.

정교한 글들을 볼때마다 부러움이 입니다.

좋은 글로 아침을 시작해 봅니다.
추천 0

IP : dc6c12a1bfdf843
만화만 보던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무협소설을 접하게 될때의 기분...

무협 소설에 빠진 기분...이건 뭐지?
추천 0

IP : eab4e28f76c0a49
어르신에게서 영 다른 냄새가 납니다...

킁킁킁~~~~~~

얼래 뭔 냄시가 이렇데요???ㅎㅎㅎ

영판 다른길로 삶을 살아오셨으니 그 까닭을 모르것네유...

다음 만남에서는 그 까닭을 청문함 해야겠슈...건강 단디 챙기세유...

집 떠나면 *고생이라잖아유...^*^
추천 0

IP : c85e244bac3be83
이 글귀가 가장 눈에 들어옵니다

"이런 현장에서 호출이 옵니다 나중에 다시갑니다"

세련되고 멋진 문장입니다


멋쟁이 피러님!..화이링!~~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