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토론방
· 회원이 토론의 이슈를 제안하면 그 주제에 대해 자유로운 댓글을 통해 참여하는 방식의 토론방입니다.
· 이슈의 범위는 제한하지 않으나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자극적이거나 비매너적인 댓글은 삭제됩니다.
· 뉴스기사 및 타 사이트의 게시글을 옮겨와 단순히 게시하는 것, 본인의 의견이 아닌 글은 삭제됩니다.
· 균형있는 게시판 사용과 신중한 이슈 제안을 위해 게시물 횟수를 3일 1회로 제한 합니다.
· 댓글에 답글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12. 1.19. 시범 적용)
· 이슈의 범위는 제한하지 않으나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자극적이거나 비매너적인 댓글은 삭제됩니다.
· 뉴스기사 및 타 사이트의 게시글을 옮겨와 단순히 게시하는 것, 본인의 의견이 아닌 글은 삭제됩니다.
· 균형있는 게시판 사용과 신중한 이슈 제안을 위해 게시물 횟수를 3일 1회로 제한 합니다.
· 댓글에 답글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12. 1.19. 시범 적용)
서해교전으로 김대중 15대 대통령을 비난만 하는 자들은 절대 모르는 역사의 진실!
최고권자의 대북정책이나 국방 군사문제는 다소 정파적 해석을 달리할 수 있는 부분은 있으나 정파를 떠나 전 국민과 국익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므로 분명히 존재하는 역사사실에 기반한 국민 모두에 도움이 될만한 글 같아 펌하오니 그 역사사실에 관해서는 정파가 따로 없고 너와 나가 따로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국민된 바른 기본자세를 견지하면서 본 글 내용에 나타난 역사사실에 대하여 국민과 국가를 위한 진실된 애국충정으로 각자의 허심탄회한 의견들을 개진하기 바라는 바이다.
---------------------------------------------------------------------------------------------------------------------------------
◆ ☞ 서해교전으로 김대중 15대 대통령을 비난만 하는 자들은 절대 모르는 역사의 진실! <펌>
(인터넷 군사카페에 2차 서해교전을 전후한 당시 대통령 김대중의 처신에 대한 촌평들에 대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도 모르는 자들에게-
*이때 우리나라 대통령은 참...
*축구 재밌게 보셨겠죠 흐
*이때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가롭게 월드컵 보고 있었죠
*군인 몇 명 죽었다고 호들갑 떨지마라 –15대 국군통수권자-
위 네명의 글은 인터넷 군사카페에 2차 서해교전을 전후한 당시 대통령 김대중의 처신에 대한 촌평들이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챙겨야 할 이들을 외면하고 룰루랄라했다는 거고 그러니 욕먹어 마땅하며 후광은 굴욕적인 대북 저자세를 취했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러나, 정말로, 실제의 사실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위에 적힌 저 냉소적이고 독설적인 평가들이 얼마나 사실(FACT)과는 동떨어졌는지 저들은 철저하게 모른다.
그리고 더 안타깝게도 그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좀비처럼 수구 조중동과 자칭보수일당들의 선동나팔에 따라 목청껏 철지난 증오와 분열의 구호를 외쳐댈 뿐, 저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이 글은 저 위의 낯부끄러운 조롱을 해댄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저이들은 아무리 진상과 사실을 얘기해줘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생각 있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저들의 선동과 악쓰기에 정말로 소중한 개인의 판단을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하겠기에 사실에 근거한 몇 가지 진실을 적어본다. 판단과 결정은 오직 당신의 몫이며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잘못된 표기나 표현이 있다면 기탄없는 지적 바란다.
1. 60,70년대 내내 박정희와 김일성은 왜 아웅다웅했는가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과정과 결과가 있다. 정전협정체결이후 남북의 대립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모르고서는 서해교전 상황이나 지금의 긴장대치 역시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요컨대 표피적 사실 몇 개만 가지고 떠들다 보니 형식논리에 매몰되어 몰상식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허위가 마치 성스런 진리인양 떠들면 그건 뭘까.
먼저 휴전선을 둘러싼 남북갈등과 무력충돌의 시원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시작된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남한의 정치상황 변동을 주시하던 김일성은 50년대 내내 강경대응만을 일관하며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던 이승만과는 달리, 박정희를 대화를 시도해봄직한 상대로 여겼다.
이러한 판단에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골수좌익으로 아우와는 달리 독립운동을 했으며, 46년 10월 대구폭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사살됨. 형이 죽자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담한다) 와 매우 절친했으며 박정희와도 잘 알고 지냈던 황태성, 박정희의 육사동기(2기)로 대대병력을 이끌고 월북했던 강태무 등의 증언을 통해 그가 과거 남로당 전력이 있고 민족주의성향도 있다고 봐 대화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박정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적지 않았던 황태성을 밀사로 파견했다.
남북간 체제를 인정하고 상호비방을 중지하며 서울과 평양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경제교류를 하자는 제안을 가지고 서울로 잠입한 황태성은 김종필을 만나 자신이 밀사임을 밝혔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황태성의 중매로 결혼한 사이였고 그런 박상희의 딸 박영옥은 후일 김종필과 결혼한다. 김종필의 장모, 즉 죽은 박상희의 처 조귀분이 나서서 황태성과 김종필의 만남을 주선했으니, 북은 나름 최적의 밀사를 보내 정치협상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들의 행각을 오늘 반공보수우익의 시각으로 보면 명백히 불법으로 접촉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박정희는 전향후에도 북과 이렇게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밀사 황태성을 만난바 없다고 부인했지만, 미국 CIA 요원 래리 베이커는 이 둘이 반도호텔 603호실에서 3번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마 둘은 만났을 공산이 매우크다.
더구나 황태성과 박정희 집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나 당시 미국방문을 앞두고 있었고 군사정권의 미국승인이 절실했던 박정희는 김종필의 조언에 따라 황태성을 밀사로 여기지 않고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남로당 가입 전력 때문에 쿠데타 초기부터 미국으로부터 심하게 의심을 받았던 박정희는 황태성을 희생양삼아 미국에게 자신을 믿어달라고 시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쿠데타 직후부터 서해상의 무인도인 용매도에서 남북 군부인사간의 비밀회담을 수차례 진행하고 있었던 북의 김일성에게 황태성의 처형은 날벼락이었고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이후 북한은 대대적이고 적대적인 도발을 시작했고 박정희와 김일성은 60년대 내내 치열한 국지전으로 피를 피로 씻는 불편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대화를 원했던 김일성, 정권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결백을 미국에게 보이는 게 절박했던 박정희의 상반된 이해관계는 이후 서로를 제거하고야 말리라는 수준으로까지 악화된다. 우리의 60년대 치열했던 남북대립은 황태성 밀사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밀사를 죽여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팠던 박정희의 야심에 대해서 북의 김일성은 무력으로 보복을 가했으니, 국가의 대사가 박정희 일개인의 권력욕에 희생된 것이다. (하긴 박정희는 35년 식민지배의 댓가를 너무도 쉽게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내팽개쳤던 인물이니, 그정도쯤이야 별거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원도 울진,삼척의 무장공비사건이나 청와대가 털릴뻔 한 1.21사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군의 공식기록을 살펴봐도 60년대 내내 남과 북은 휴전선을 둘러싸고 거의 3일에 한 번 꼴로 총격을 주고받았으며 그 규모는 분대나 소대급의 소규모 전투뿐이 아닌 중대나 대대가 동원되는 수준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포병을 동원해 서로의 벙커를 직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최전방 GP에서 근무해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전설적인 얘기들, 한밤에 자고 있는 내무반에 수류탄을 던지고 달아난 무장공비의 얘기라던가 보초를 서는 초병의 목을 잘라갔다는 으스스한 일화들은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만큼 양측의 대결은 첨예했고 공식적인 우리 측 사상자가 무려 3천명에 이를 정도로 그 양상은 치열했다. (결국 70년대초 밀사 이후락을 북으로 보내 남북대화를 추진하게 된 것도 양측의 국지적 도발이 너무도 심화되고 일상화되자, 자칫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염려한 남과 북의 암묵적 동의하에서 시작된 셈이다. 당시 이후락이 독약을 휴대하고 있었던 것도 황태성을 먼저 죽였기 때문에 북의 보복을 두려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60년대 지속된 남북간의 갈등은 지상전에서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곧잘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들은 우리에게 대부분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대표적인 것을 몇 개 꼽으면 67년 1월 동해 거진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해군 초계함 PCE-65(650t) 당진호가 북의 해안포기습으로 침몰한 사건을 꼽을 수 있는데 당진호에 타고 있던 장병 79명중 39명이 전사했다.
두 번째 서해교전의 전사자 6명의 무려 6배하고도 3명을 더한 막대한 피해다.
비극은 계속된다. 70년 6월 서해상 연평도 공해상에서 어선을 보호하던 우리해군의 120톤급 방송선(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경비정이었음)이 통째로 북한해군에게 나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당시 승선해있던 23명의 해군장병들의 생사를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74년 6월 28일에도 거진 앞바다에서 우리 해경 경비정 836함이 북해군 3척의 공격을 받고 격침당하는 가슴 아픈 일이 또 벌어졌다. 이번에도 오징어잡이 어선을 보호하다 생긴 일이었는데, 인양된 해경 시신 6구는 모두 구명복을 입은 채 총알이 관통된 다리 등에 지혈대를 매고 있어 이들이 최후까지 용감하게 저항했음을 짐작케 했다. 사건발생 2주일이 지나서 침몰현장에서 163마일이나 떨어진 영일만에 김시오,김원한 두 순경의 시신이 떠올라 다시한 번 유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순경은 모두 울주와 영일출신이었다고 한다. -.-
이렇듯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서 우리해군은 북해군에게 철저히 농락당했고 단 한번도 속시원한 보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74년 해경경비함의 침몰이후 더 이상의 남북한 해상충돌은 없게 되는데, 그 주된 원인이 우리 해군력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연이은 피해를 견디다 못한 박정희정권이 이후에는 북이 주장하는 군사분계선 연장선을 넘어가는 강경책을 포기했던 때문이다.
박정희는 북의 12해리 주장을 결국 한수 접어주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두 번째 서해교전 상황만 들먹이는 인간들 중 이 가슴 아픈 세 사건과 그 이후 박정희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북에게 굴종했는지에 대한 전말을 들어나 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그때 박대통령은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에게 그리고 유족들에게 어떤 예우를 했었는지 제대로 알고는 계시는가?
자세한 얘기는 뒤에 다시 하도록 하자. 아마 지금 들은 걸로도 상당수는 멘붕일테니. 우리가 아는 박정희는 북한에게 집권 18년 내내 큰소리는커녕 걸핏하면 귀쌈을 맞고 혼자 분을 씩씩거려야 했던 적이 더 많았다.
안보에서 박정희는 그의 조작된 경제성적표 못지않은 낙제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박정희의 치세가 우리의 안보에서 가장 굳건했던양 떠들어 대시는 당신들 도대체 그 근거가 뭔가? 저 엄청난 개굴욕의 기록들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오시는가?
2.첫 번째 서해교전이 왜 연평해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99년 6월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벌어진 첫 교전에서 모두가 잘 알듯이 우리는 북해군에게 일방적인 완승을 거뒀다. 여태까지 국지적 대결에서 높은 승률을 자랑하던 북 해군은 자만하다 개망신을 당한 셈이다.
이 승리로 해군은 연합사의 미 연락장교에게까지 훈장을 수여했을 정도로 푸짐한 논공행상을 벌였고 거창한 승전기념비를 세웠으며, 이 교전에 사실은 조금 과한 연평해전이라는 명칭까지 부여하며 한껏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었다. 이겼다고는 하나, 한낱 국지적 충돌에 불과한 작은 전투에서 이토록 호들갑을 떨면서 요란을 떨었던 건 바로 60,70년대에 걸쳐서 언제나 북해군에게 처절할 만큼 당했던 아픈 트라우마를 씻어낼 수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환호의 밑바닥에서도 우리해군이 너무 승리에 도취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부에선 북의 감정적 보복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당시 해군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게다가 2000년 잘나가던 한미공조가 부시의 집권으로 파열음이 생기면서 정보협력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6월 29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했고 우리 해군은 첫 교전에 비해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357호를 상실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다시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수구조중동과 자칭 안보최우선 보수우익들은 기절초풍할 논리와 단어들을 쏟아내며 당시 군통수권자를 바보병시으로 만들어대기 시작한다.
요약하면 대북 퍼주기 하고서도 귀쌈 맞고 김정일 계속 따까리질 한다느니, 서해교전에 관심을 전혀 안가지고 월드컵 축구나 보러가서 희희낙락거렸다느니, 대통령이 추모식에도 안오고, 유족들은 청와대에 초대도 안하고 전사자유족들에 대한 원호보상금도 당시 화재로 사망한 매매춘여성들보다 적게 줬다느니, 그래서 이에 절망한 유족이 이민을 결심했다느니, 정말 엄청난 기세로 욕을 퍼부어댔고 물어뜯어댔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비난과 욕설은 여전하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볼까?
첫 번째,
다시 서해교전이 발생하자, 당황한건 우리보다 북의 김정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통일부 정세현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북은 핫라인을 통해서 우리 국가원수에게 이 일에 대해서 상층의 지시가 아닌 일부강경세력의 통제되지 않은 무력도발임을 설명했고 이들에 대한 철직(교체)이 단행되었으며 사과의사를 매우 신속하게 밝혔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 북은 매번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던 여러 현안의 협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요구에 협조적이고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꿀리는 게 있었기에 우리 말을 잘 듣게 된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일부 얼빠진 자칭보수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결승전에 태연하게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핫라인을 통해서 사태의 전말을 완전히 파악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한 우리는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에게 관용과 함께 도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온양면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수행했고 이후부터 북의 침범이나 도발횟수는 후임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서 최저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뭘 말하는 걸까.
두 번째,
대통령이 추모식에 안오고 전사자 유족 신경 안쓴다고 했지만, 2003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어 취임한 노무현 16대 대통령은 2003년 6월 27일 교전1주년을 앞두고 2함대를 방문해 357호 전시장을 둘러봤고 교전전적비에 헌화묵념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노대통령은 이보다 앞선 6월 25일 서해교전 전사자 가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하며 보훈처를 부로 승격하겠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서해교전당시 다리를 잃고 현역으로 복귀했던 이희완 중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했고 매년 설날에는 유족들과 부상자 참전자 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이러한 대통령의 행보는 2007년 임기말까지 계속되었다. 그해 5월에도 윤영하 소령의 유족들과 동티모르 파병순직자들과 함께 오찬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3년 2월 퇴임한 관계로 그 후임자 노무현 대통령이 더 이상 어떻게 해줄 도리가 없을 만큼 유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예우를 다했는데도 대통령이 유족신경 안썼다고 떠들어대는 당신들 도대체 뭐냐?
세 번째,
원호보상금에 대한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은 더 많아진다. 당시 길거리 여성보다 더 적게 책정된 보상금규정을 만드신 분이 누군지는 아시는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시다!
70년대초 월남전파병의 후유증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보훈대상자들이 증가하게되자,박정희는 법을 제정해 최종계급의 36개월치 월급만 지급하도록 규정을 개악해버렸다.
그리고 국가의 보상은 단 1회로 제한시켜버렸고. 실로 악질적이고 살인적인 규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을 만들었던 자들의 후예들이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들에게 돈을 적게 준다고 그렇게 욕거품을 물수가 있는 일인가?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결국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규정의 개정을 지시했고 법개정과정을 거쳐 2005년 노무현 정권에 와서야 전사한 장병의 유족에게 최고 2억의 사망보상금을 줄수 있도록 규정이 바뀐다. 실상이 이런데도 김대중이 나몰라라 했다고?
그리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박정희의 악법덕분에 고작 3천만원을 받았던 유족들에게 성금모금과 각종 지원을 통해 모두 24억원을 추가로 서해교전 유족들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이다.
이런데도 길거리 창녀들보다 적게 줬다고 아직도 떠드는 놈들은 도대체 뇌를 어디에 달고 사는 건가.
두 번째 서해교전은 후광의 임기 말년에 일어난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자기가 할 일을 다했고 그간의 잘못된 규정이나 법으로 억울함을 가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던 흔적이 이토록 분명한데도 김대중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목청을 높이는 당신들 참 불쌍해보인다.
사실관계에서 이렇게 심한 무고를 하고도 할말이 남았는가.
염치와 수치가 있거든 그 가증스럽고 촐삭대는 입 다시는 열지 마라. 추하다.
3.위대하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3번의 참패 후 무얼 하셨을까
자, 1장 막판에 했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김대중 비난자들은 서해교전후 김대중이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여댔지만 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분은 김대중 비난자 여러분이 대부분 숭배해마지 않는 박정희 대통령각하시다!
당진함이 포탄에 맞아 침몰했지만 우리나라 어디에도 박정희가 건립한 당시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나 전적비가 없다. 또한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해 그 누구도 이들을 제대로 예우하지않았다. 그러니 39명의 전사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한민국 궁민은 아무도 없다!
왜냐? 박정희 정권은 이 수치스럽고 굴욕스런 참패를 쉬쉬했으니까. 아니 보안과 안보를 이유로 입도 뻥끗하지 못하도록 이나라 백성들을 찍어눌러버렸다. 그리고 저들 전사자와 유족들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로부터 그 어떤 위로나 후한 보상금이나 예우를 받은 바가 전혀 없다.
유족들이 그 한스런 세월동안 어찌 살았는지 짐작이나 가시는가.
더 안타까운 건 70년 6월 끌려간 해군방송선 생존병사들이다. 아마 지금쯤 60대의 초로로 살아있을지도 모를 이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박정희 정권은 단 한번도 제대로 유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보상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가 만든 악법대로 최종계급시 월급 36개월치만 주고 걍 입 씻었을 거다.
박정희 집권기간중 그리고 그이후 내내 반공보수를 표방했던 그 어떤 대통령도 이들의 행방에 대해서 북에게 항의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떻게 국가가 나라를 위해 최전선에서 싸우던 이들을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그 어떤 행사도 치러지는 모습을 과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르는 시기까지 나는 본적이 없으니까 그나마 조금 나은 게 해경의 경우인데, 박대통령께서는 이번에도 생까고 마셨다.
74년 해경 경비함 전사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충혼비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7년이나 지난 86년 사건발생 12년만에 해경과 해경 동우회분들의 성금으로 어렵게 건립되었다.
그러구도 역대 대통령 누구도 이에 대해서 신경써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 4월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그 이듬해 4월 노무현 정권때 다시 조경공사가 추가로 실시되었다.
세 번의 굴욕적인 참패도 참패려니와 이를 철저하게 일반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 어떤 예우나 배려도 전사자와 전사자들의 유족에게 행하지 않았다.
도리어 박정희가 외면했던 이들의 예우를 행하고 대통령의 의무를 다했던 이는 그가 죽이려고 했던 김대중이었다는 이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는가?
조중동과 새누리 자칭보수들의 반공선동질에 현혹되어 진짜 기억해야할 용사들과 그들의 희생을 외면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수십년째 나몰라라 했던 당신들이 어찌하여 유독 두 번째 서해교전의 피해자와 허물만을 가지고 이토록 길길이 날뛰는지 나는 그게 참 이해가 안간다.
도대체 니들 왜 그러는건데? 서후원 박동혁 윤영하 이런 분들 기억하는 거 안말린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 잊어버린 39명의 당진호 용사들! 소식조차 돈절된 23명의 해군용사들...수백리 바닷길을 흘러흘러 고향앞바다에 와서야 떠올랐던 김시오 김원한 순경과 같은 분들에 대해서 여태 반공과 애국과 보수와 우익을 자랑하던 당신들이 과거 뭘 했고 어떻게 해왔었는지에 대해선 자신있게 할말들은 있는겐가?
마지막으로 김대중에 대한 칭찬하나만 하고 가자.
한국전 발발 50주년을 맞아 2000년 6월부터 기념사업단을 결성하고 김대중 행정부는 ‘전사자 유해발굴사업단’을 출범시켰다. 3년간 한시적으로 시작했던 이 사업은 유해 781구와 유품 2만 6천점을 수거하는 성과를 이뤘고 2003년 6월 사업이 끝나던 해가되자 노무현 행정부는 이를 국가영구사업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발굴된 유해는 1천구에 이르고 사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심했고 북에 굴종했다고 욕하던 김대중은 역대 대통령들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 뜻을 김대중 못지않게 용공좌경으로 욕을 먹었던 노무현이 이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뭐 느끼는 거 없는가. 누가 진정한 보수일까?
매번 이런 일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나라는 참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해서 박하고 자주 까먹는다는 거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과연 그런 잘못을 가장 많이 저지른 집단이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고 얘기하고 살았으면 싶다.
역대 군사정권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가 그냥 생각하기엔 이들이 가장 군사와 국방문제에 앞장서고 전사자와 유족들을 챙겼을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저들은 희생자와 전사자 그리고 유족들에 대해서 냉혹하다 못해 잔인할만큼 무관심 했고 박정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산골구석에 반세기가 넘게 처박아두고도 발굴조차 시도해보지 않았던 자들이었기에 그깟 몇 명 정도 죽은건 대수롭지 않았는가는 모르겠으나, 정녕 이 나라에서 누가 호국영령들을 예우하려고 애썼는지 따져보지도 않고서 지금처럼 수구나팔수들의 선동에 휘둘려 진정한 공로자를 이토록 매도하는건 이중잣대가 너무 심한 거다.
도대체 뭐가 상식이고 뭐가 옳고 그른지도 모른다는 쓴소리를 들어 마땅한 가치혼돈과 무지가 아니고 뭘까.
김대중 비난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 서해교전 이전에 있었던 저 세 번의 아픈상처와 희생자들이 지금 어찌 사는지 유족들이 어찌 사는지 단 한번이라도 지금까지 목소리를 높여 본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무심했던 정권과 그 정권의 수장에 대해서 제대로 된 쓴소리라도 해보았는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중잣대 들고서 죽어라고 미운놈 욕하면 행복하신가. 이런짓 하는게 사람 사는 건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