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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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인 나에겐 아직 이른 시간이다.
아직 밖은 어두운데 부시시한 눈을 비비며 더 자고 싶은 마음보다는 나들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내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어느새 어머니는 부자간의 모처럼의 나들이를 위한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 놓으셨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길 한손에 작은 가방하나 들고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내가 태어난 곳인 우리집(인천 중구 선하동)에서 수인역까지 1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수인역에는 증기기관차가 시커먼 연기와 하얀 증기를 힘차게 뿜으며 도크에서
수원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기차는 새벽을 깨우는 우렁찬 기적 소리를 내뱉으며 서서히 힘겹게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금은 추억속으로 사라진 수인선은 그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협궤 열차로 일반 기차의
레일 보다는 폭이 좁은 꼬마 열차였다. 그 때는 어린눈에 많이 커보였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일반 승객보다는 장사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아주머니,할머니 승객들이 대부분
이었고 승객들의 짐으로 좁은 통로는 발디딜 틈도 없었다.
마주앉은 일행인 듯한 승객들의 대화가 좁은 기차안을 시끄럽게해도 그안의 모든 것들이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기차는 송도, 남동, 소래역 그리고 소래철교를 건너 달월, 군자역을 지나
고잔 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땐 기찻길이 해안선을 따라 있었기 때문에 해 뜰 무렵의 바닷가 풍경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바닷가를 따라 길게 드리워진 염전의 모습은 푸른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감동적인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작은 역에 내려 한참을 논둑길을 따라 걸으면 언덕위에 넓은 저수지가 물안개에
가득 싸인 채 눈앞에 나타났다. 어린 마음에도 그때의 풍경들이 참 아름답게 보였고 그 풍경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나의 낚싯대를 펴서 찌를 맞추고 미끼를 끼워주셨고 많은 요령들을 자세하게
가르쳐주셨다. 아버지는 낚시를 하시다가도 내 낚싯대의 미끼가 떨어지거나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웃으시며 내 채비부터 손 봐 주셨다.
요즘 가끔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낚시를 가보면 그 일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모른다.
그걸 보면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나보단 한참 크셨다는 것을 새삼 깨달게 되었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그리워진다.
난 그 무렵 낚시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와의 낚시여행은 강화
내가저수지를 마지막으로 1991년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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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부럽기도 하네요,, 전 아버지랑 같이 놀아본 기억이 잘 나지 안습니다.
제 기억속에 아버진 조금은 무서운 듯한 .....................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도 행복합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애들 데리구 부모님 뵈러 갈때는
저도 아직 어린아이 마냥 신납니다..
(전 대전..부모님은 경주시부근 시골에 거주하시기에 자주 가질 못합니다)
마누라 왈....."그리 좋으냐" 합니다......그럼난 "그래"...하면
마누라 " 어머니랑 살아라 " 합니다..농담으로요..ㅋㅋㅋ
낚수에 빠져 조금은 부모님을 덜 찾아 뵌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올해는 좀더 자주 찾아뵈야겠습니다..
그냥1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여............그리고................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