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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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통 열린 구름 사이로
잠깐 비추던 따가운 태양이
장년(長年)의 나이만큼이나 빠르게 기울어 갈 무렵,
올해 쉰 아홉의 내 친구는
오늘도 변함없이 낚시를 갑니다.
이른 저녁 먹고 더위 핑계 삼아 물가를 찾는
그의 낡은 트럭 짐칸에는 십 년도 더된 빛 바랜 가방하나
덩그라니 놓여있고
그 곁엔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진 작은 낚시의자
아무렇게나 굴러다닙니다.
방앗간 참새 마냥
친구는 우리 집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헛웃음 치며 들어와
그 좋은 넉살로 내 아내 추어주고
냉커피 한잔 얻어 마신 뒤
눈치 슬쩍 보며 제것이나 되는 냥
내 낚시가방 들어 제 낡은 가방 옆에 나란히 싣습니다.
달리는 차 속에서 스쳐본 친구의 눈가에
주름이 깊습니다.
늘 웃음 짓는 그의 표정 끝에
불현듯 애릿한 삶의 무게가 느껴지고...
속 깊은 친구의 갈무리가 단단해서 그렇지
이렇게 찾아가는 물가의 시간들이
단순히 여유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친굽니다.
쓰러져 가는 농촌을 변두리로 둔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차마 민망할 만큼
피폐(疲弊)해져 가는
시내 한 모퉁이에 터잡고 살면서...
화려한 도시에로의 꿈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듯 싶지만
그래도 지금 보다 더 고달프던 시절도 기억하고있어
웬만한 어려움엔 궁핍한 내색하지 않고 사는 친구입니다.
거머리와 토하(土蝦)가 많아서 더 情이 가는
운곡지(雲谷池) 상류
친구는 요새 보기엔 어쩜 부끄러울 수도 있는
흠집 많은 그라스 롯드 세 대를
수초 옆 공간을 찾아 스스럼없이 폅니다.
"가벼운 걸로 두어대 줄까?"
낡은 그의 낚시대를 보며 언젠가 내가
넌지시 물어 보았을 때 친구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버님이 쓰시던 거라네!"
콩알 낚시를 즐겨하던 친구가
무슨 일인지 새우 망을 담갔습니다.
"오늘은 큰놈을 좀 잡아 볼 요량일세!"
운곡지(雲谷池)는 새우 발이 엄청 좋은 낚시텁니다.
작년 이맘때 둘이서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콩알을 했고 난 새우를 달았었습니다.
둘 다 삼십여수의 붕어를 잡았지만
내가 잡은 붕어가 훨씬 굵었습니다.
아마도 친구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나 봅니다.
벌써 몇 번째 친구의 환호성이 터진지 모릅니다.
붕어들의 입질은 의외로 활발했고
붕어의 활성도 만큼이나 친구의 수선스러움도 더해갑니다.
그건 그의 습성이자 지론(持論)입니다.
대물을 노리고 숨죽인 체 앉아있는 건
수도승(修道僧)이나 할 고행(苦行)이지
맘에 맺힌 것 풀려고 가는 낚시나, 레져로서의 낚시는 아니랍니다.
가끔씩 나 혼자 숨어하는 대물낚시를
트집잡고 늘어지기도 하는
조용한 낚시와는 거리가 먼 친구,
그는 고기를 건 순간 즐거워하며 저렇듯 소리 지릅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중에도
난 그가 어느 정도의 고기를 잡고있는지 다 알고있습니다.
지금 열 두 마리 쨉니다.
계곡의 물가는 밤이 깊은 만큼 싸늘해지고
새우를 물고 올라오는 십 여수의
씨알 좋은 붕어에 취해 잊었던 한기(寒氣)가
입질이 뜸해진 어느 순간 갑자기 밀려듭니다.
벌써 알고 있다는 듯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낡은 낚시가방을 헤집고 소주 두 병이 나왔습니다.
"술은 일인일병( 一人一甁) 해야 한다"고 노상 얘기하는 친구.
그러나 기실(其實)은 말뿐,
오늘밤도 소주 두 병 중 한 병 반은
이미 그의 몫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또 모르긴 해도 그의 가방에
한 두 병쯤은 더 감추어져 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친구는 채집망에 든 새우 반쯤을
라면과 함께 안주로 끓여 내놓았습니다.
"작은 녀석이 왔다네!"
몇 잔의 술에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친구가 말합니다.
작은 녀석이란
서울의 유명 대학에 재학중인
그의 둘째 아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녀석이 많이 야위었더라구!"
친구 눈가에 안쓰러운 부정(父情)이 묻어있습니다.
생활이 그의 웃음만큼 넉넉하지 못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줍잖은 시골살림 아이들 대학 보내기가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언젠가 친구와 자식들 뒷바라지 제대로 못 하는
가난한 부모로서의 자책감(自責感)을 얘기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밤 친구가
왜 새우낚시를 시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친구는 물 좋은 곳에서 자란 씨알 좋은 붕어를
여윈 아들녀석에게 보약(補藥) 대신 고아 먹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구름 사이로
언뜻 비친 별빛이 사뭇 맑습니다.
휘파람새의 긴 여운이 산자락을 쓰다듬으며 지나가고
살림망 가득 씨알 좋은 붕어를 담은 친구는
이제 모처럼 집에 온 둘째 아들이 보고싶은가 봅니다.
어느새 짐 싸 짊어지고
흔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차를 향해 걷습니다.
술 냄새 풍기는 친구를 대신해서 핸들을 잡았습니다.
별 의미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친구는
어느새 쓰러져 잠이 들고
자꾸만 모로 누우려는 그의 모습에서
외로움 같은 것이 묻어납니다.
문득 친구가 그렇게나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둘째아들이
몇 년 전 신장병(腎臟病)으로 고생하다 죽은 그의 아내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나이 먹은 낚시꾼의
그라스롯드 낚시대를 비웃지 마라!
그의 낡은 대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잔뜩 묻어있다.
물가의 고요를 깨고 함부로 웃는
낚시꾼의 무례(無禮)를 탓하지 마라!
그 웃음소리엔
가난한 아비의 끈끈한 자식사랑이 섞여 있다.
그리고 차마 다 내보이지 못한
또 하나의 사랑도
비린내 나는 붕어 비늘에
애틋한 그리움으로 늘 함께 묻어있느니...
어유당(魚有堂)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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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분의 끈끈한 우정에 부러움을 ...
친구분의 애틋한 부정에 애잔함을 ...
말없이 어유당님의 낚시가방을 싣는 모습에 입가에 미소를 짓다가
사별한 부인과 그분을 닮은 아드님에 대한 사랑에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힙니다
아무쪼록 친구분 늘 넉넉한 웃음 잃지 않으시길 바라며 아드님도 아버님의
크신 사랑에 큰사람이 되시길 빌어 봅니다
어유당님의 글은 언제나 감동과 웃음과 재미를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