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 균형있는 게시판 사용을 위해 1일 1회로 게시물 건수를 제한합니다.
유년으로 떠난 옹당이 못의 추억(하)
마른 버섯제품은 수출을 하고 대량생산 시설 기반이 되어 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이참에 거래를 트기 위해 동행을 부탁했다.
동행은 하지만 같은 차로 같이 움직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에 그 친구는 의아해 했다.
지병을 고쳐야 한다는 이야기에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물 철이 가기 전에 저수지 순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버섯생산 시설과 가공공장을 둘러보고 납품 날자와 계약서 작성을 한 후, 동창생은 먼저 대구로 출발을 했다.
K의 아내가 정성껏 차려준 술상을 놓고 둘이 앉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순배의 술잔이 돌았다.
그때 친구는 아내를 불러 갑자기 멸치 젓갈을 주문했다.
다른 안주가 상에 가득한데 술안주로 멸치 젓갈이라니?
친구의 아내는 잘 익은 멸치 젓갈에 풋고추, 마늘, 참기름 등 양념을 잔뜩 넣어 접시에 담아왔다.
친구는 배추속잎에 젓갈을 얹어 한입에 넣으며
“이거 한번 먹어봐라.”
“짤 것 같은데.”
“햐! 입맛이 변한 건지 이젠 정말 옛 맛을 느낄 수가 없어.”
“허! 참. 이 친구는 음식도 향수에 젖어가며 먹는 것 같아.”
술상에 놓인 멸치 젓갈을 보는데 갑자기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왔다.
옛날 우리 할머니께서 멸치 젓갈을 종지에 담아 먹어보라고 그 친구의 집에 들고 오셨단다.
그날 저녁 최고의 반찬이었으며, 식구들이 아주 맛있게 먹었는데 짜서 밤에는 물을 한말을 마셨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반찬 중에 그때 그 멸치 젓갈 맛을 능가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단다.
당시 우리 집에는 어떻게 멸치 젓갈이 있었는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며, 친구는 우리할머니께서 담아온 그릇의 색깔과 모양까지 기억을 하고 있었다.
유년기의 어슴푸레한 추억들이 수면 속에 깊은 잠을 자다가 일어나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여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변화되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을 친구는 너무 소상하게 많은 분량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새 몇 번 친구의 농장에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술상을 물리고 둘은 옛날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버섯가공 공장 뒤를 돌아 산책을 했다.
생산시설과 가공 공장 외에 빈 공터로 남아 마른 잡풀 속에 묻혀 있는 공지가 무척 넓어 보였다.
위락시설을 건설하려던 업체가 부도가 나고 현장 부지가 경매로 넘어가기 전에 구입을 했다고 말을 했다.
땅 투기를 많이 했다고 농담을 하자, 친구는 웃으며 가방 끈이 길고 눈이 빤질빤질해야 투기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고 물 버들이 크게 자란 곳을 보며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저곳에는 저수지가 있는 것 같아”
“아니야. 저수지는 아니고 그냥 옹당이 못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뭐야? 옹당이 못이라고?”
둘은 그곳을 향해 걸었다.
약 800여 평의 직사각형 웅덩이였다.
20,000여 평 정도의 부지에 3개의 웅덩이가 있다고 했다.
위락시설의 기초공사를 위해 굴삭기로 땅을 팠기 때문에 크기와 깊이, 모양이 동일하다는 이야기였다.
낚시꾼의 눈에는 물만 보면 당장 펴고 싶어지는 게 지병이다.
지하에서 물이 쏟는지는 모르지만 물의 유입부와 배수로가 없는 전형적인 웅덩이였다.
“그런데 여기 고기는 있어?”
“그럼 있지.”
“아니 물의 입수와 배수가 전혀 없는데 고기가 어떻게 여기 있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어느 해 장마철에 저 앞에 하천이 범람한 적이 있어. 아무래도 그때 유입된 것 같아.”
“ 크기는?”
“ 모두 어른 고무신짝 만하다.”
“그으래? 고무신짝이라면 준척이나 월척 급이 있다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당하기도 했지만, 오늘 출발할 때 염두에 둔 저수지 순례를 포기하고 미지의 옹당이 못에 점방을 차리기로 했다.
차에서 낚시 가방을 꺼내 짊어지고 와서 낚싯대를 펴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는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동네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와서 낚싯대를 달랑 두 대를 펴 놓고 낚시를 하시더라.
처음에는 요강단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궁금해서 여기에 고기가 있느냐고 물었지. 아! 그런데 말이야 영감님이 대답을 하기 전에 ‘어, 어!!’ 하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낚싯대를 세우지도 못하고 줄을 터뜨리고 말더라.
아, 여기도 고기가 있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
어른에게 양해를 얻어 살림망 구경을 하니 굵은 씨알만 골라 한 망태를 잡아 놓았더라고 친구는 말을 했다.
그날 이후 여기에 고기가 있다는 걸 알았단다.
시골이라 그렇게 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으며, 옹당이 못은 동네 어르신 전용의 소일거리 단골 낚시터라고 했다.
낚싯대 두 대를 펴서 한 대는 친구에게 건넸다.
던져 놓고 보니 어설픈 조사가 미끼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때 친구가 반짝이는 은색 핸드폰을 꺼내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소시적 가정환경 조사시간에 집에 전화기가 없어도 있다고 손을 들었던 그 시골 소년의 손에는 당시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세월을 넘어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특명을 받은 친구의 장성한 아들 녀석은 어설픈 아버지 친구의 손님접대를 위해 플라스틱 통에다 지렁이를 잡아왔다.
연신 입질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 해 동안 굶주려 왔던 찌오름의 눈맛과 감각적인 손맛을 진하게 보았다.
처자식을 둔 가장에다 이마에 주름살까지 생긴 나이를 벗어나 먼 옛날 코흘리개 시절로 되돌아갔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붕어의 크기 비교와 낚는 기술을 자랑했다.
옹당이 못은 그해 가장 나에게 진한 손맛을 보여준 캐치탕이었다.
친구의 따뜻한 우정을 느끼며, 그날 늦은 저녁을 먹고 대구로 귀가했다.
다음 주말에는 예식장에 가서 축하를 해주고, 딸을 시집보내며 섭섭해 할 친구에게 술 한잔을 권하고 싶다.
END
인사드립니다.
다사다난했던 을유년도 뒷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2005년은 많은 가르침을 주고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이.......
덜렁 남아 있는 한 장의 달력.
달력에 한 칸을 남겨둔 마지막의 숫자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2005년 한 해 동안 부족한 저에게 많은 도움과 격려를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가오는 2006년!!
희망찬 병술년을 맞아 항상 건강하시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모두 다 이루어지시길 바라며, 가정에도 화목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5년을 보내는 막바지에 서서
입질!기다림 드림.
|
|
|
|
|
|
|
|
|
|
잘읽고 갑니다.
입질!기다림님!!!
님의 아름다운 우정 영원히 변치 마시고
밝아오는 병술년엔 하시는일마다
행운만이 함께 하시길 빌어 봅니다.털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