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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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6

꾼들의낙원 IP : b06d2fe0d96c337 날짜 : 2015-08-20 20:03 조회 : 3949 본문+댓글추천 : 3

6.

독방에 수감된 수석 연구원 지석은 바깥세상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의 테두리 안이 연구소였다면 현재의 그는 한 평 남짓한 사각의 벽 안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무죄추정원칙에 따른 재판도 없이 수석 연구원 지석은 이미 형을 확정해 놓고 갇힌 기결수의 입장이었고 제약과 통제가 따르는 가운데 꿋꿋이 버텨야 했다. 가슴 아픈 일은 미혼이자 독자인 그가 중범죄자로 낙인 찍히고 누구보다 자신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지지했던 연로한 부모님
이 받고 계실 참담한 고통이었다. 면회는 계속적으로 거부되었고 당신의 아들을 흉악범으로 규정해 놓았을 세상의 손가락질과 오르내릴 수많은 뉴스가 수석 연구원 지석에겐 가장 걱정이었다.



친구로 믿었던 민철의 믿기지 않는 변모 또한 그에게는 지독한 모멸감을 불러 일으켰다. 우울과 조증이 번갈아 찾아드는 차디찬 독방의 바닥에 누워 한동안은 꼼짝도 하지 않고 식사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학대하기도 했다. 냉정과 절제를 찾고 번민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까지는 긴 시간의 너울을 건너야만 했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는 우정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수석연구원 지석은 아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찾아야 하는 길, 그 길은 사각의 벽에 가로 막히고 딱딱하게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내는 힘, 남겨진 희망에 대한 의지를 결코 꺾거나 꺾기지 않는데 있었다. 굴복한다는 것과 체념한다는 것은 32살의 청년
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벽을 통해 자신과 마주하며 안정을 찾은 어느 날 수석연구원 지석은 차전무와의 면담을 신청했다. 그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본래의 그로 돌아왔다. 이제 민철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부하로부터 고분고분 지시에 따르고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고 차전무 민철은 독방으로 찾아왔다.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수석연구원 지석은 담담히 가슴안에 무지르고 구겨 넣고 꺼내어 비통한 눈물조차 메말랐던 심정을 차분한 어조로 풀어 놓았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친구인 너의 얼굴을
사실 맞이할 자신이 없다. 금간 우정을 붙일 수
있는 접착제가 있다면 솔직히 바르고 싶은
심정이다. 틈이 벌어져서 쓸어담아도 벌어지고
멀어지는 거리를 꿰맬 수 없다는 것이 아파서
날마다 벽을 쳤고 나를 용납할 수 없어 힘들었다
".





그랬다. 민철에게 윗선으로부터 기획안이 주어지고 수석연구원 지석을 포섭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이후 통신학술회에서의 접근과 만남,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주입한 수석연구원 지석의 성장배경, 가치관, 자라온 환경, 가족관계를 세부적으로 암기하고 기억해야하는 그의 정보를 접할 때부터 차전무 민철과 수석 연구원 지석은 달랐다. 철두철미하고 신중하게 한 치의 오차없이 이루어진 계산과 그 계산을 통해 파악한 동선으로 만든 우정은 깊이도, 색깔도, 의미조차도 달라야 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포카페이스를 갖춘 냉혹한 인물이었기에 민철은 선택되었다.



국가의 부름이란 명제를 달고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고 투입된 그와 별장 안내자 명진은 비밀소속이었다. 그들의 윗선은 '목자F'라는 연락책을 통해서만 지시를 내렸고 목자F가 일개 개인인지 단체인지는 민철과 별장 안내자 명진, 두 사람 모두 접근 권한을 가질 수는 없었다.
목자F는 기획안을 구상하고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차전무 민철과 별장 안내자 명진을 발탁한 것이다.




D프로젝트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훨씬 오래전부터 권박사의 연구소에 대한 물밑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 모두에게 부여된 공통의 목표는 역시 보안이고 서로 간의 협력을 통해 기밀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들의 명령에 따른 엄격한 수행능력을 필요로 했다.
목자F는 적어도 20년 전에 이 작업을 했을 것이다. D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리고 문제가 극대화되고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그것을 모조리 떠넘겨야할 대상, 자신들을 대신하여 책임질 사람을 세우고자 했고 권박사가 추방된 이후 PC방에서 검색한 산드라블록 주연의 영화 'NET(네트)'처럼 지워진 신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D프로젝트 사수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통을 감추고 대신 죄를 덮어쓰고 깃털의 배역을 안성맞춤으로 연기해 줄 인물. 성향이나 가치관이나, 연구실적과 언행과 다루기 껄끄러운 대상, 사회 적으로 추앙을 받거나 평판이 좋은 인물은 훨씬 몰락의 충격과 파장이 크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완벽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 인물이 바로 권박사와 권박사의 연구소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조종한 것이 목자F였다.


수석연구원 지석에게 만들어진 대본에 따라 충실한 연기를 하고 그를 통제하는 윗선의 목표를 위해 적나라하게, 교묘하게, 살벌하게, 아름다운 우정까지 첨가하여 만들어진 고도의 전략이 또한 차전무 민철이었다.


D프로젝트의 그물망(차전무와 별장 안내자명진)에 사로잡힌 권박사와 수석연구원 지석은 윗선을 대체할 소모품이었던 것이다.





" 오랜만이다, 살쾡이 같은 독기어린 눈
으로 날 잡아 먹을듯 하더니 이거 의외인걸!
많이 아팠던 모양이구나!! 적당히 해라!!
이상적이기 보다는 현실적이라야 사는데 지장 없지!!
이거 너무 맨숭맨숭해서 재미가 떨어 지는데....."


민철은 경계심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분명 수석연구원 지석이 자신을 만나려 하는 것은 꿍꿍이 속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프다, 그러나 왜 네가 내게 이래야 했는지
더는 묻고 싶지 않아,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나만 알아주길 빈다.
동갑내기 친구로써 널 만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고 너를 자랑스러워 했다는 것을.....,
내게는 정말 소중한 우정, 그래 그것 뿐이다.


"넌 말야 늘 이런 식이었지, 감정적이고 감상적이며 과학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인정에 끌려 다닌다는 점, 이것이 너의 약점이고 난 그 약점을 네게 가르쳐 줬을 뿐이야!!
넌 항상 너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난 세상의 꼭대기에서 바라 보기에 너처럼
인정이나 연민에 끌려 다니지 않아 !!!
너와 내가 다른 점이라면 이 점인데,
사소하지만 이것이 널 무너뜨린 것이다."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는 수석연구원 지석에게 핀잔을 주면서 차전무 민철은 냉소적이고도 차갑게 분명한 선을 그었다.



"생명을 다루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임을....연구자로 살아온 내겐 소명의식이
있고 그건 내가 독방에 갇혀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야!! 그럼 내게 보여준
네 우정은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무가치였구나
"

수석연구원 지석은 가급적 민철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가치!!! 웃기는 일이지!! 인정해 너의 이타심과 소영웅주의가 평가받게 되는 날도 분명 있겠지!! 그런데 현실을 똑똑히 봐!! 넌 너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나락에
떨어졌고 전부를 잃고 말았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미 완제품, 검사와
결점체크가 끝난 완벽한 명품이고
넌 말이야!! 클레임이 걸려 리콜을 기다리는
불량품일 뿐이지!!!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수석연구원 지석은 입질이 오기 시작하는 민철을 보면서 침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변명하지 않겠어, 내가 부족하다는 것과
때때로 냉철하지 못한 처신을 하고 네 말처럼
정에 연연한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게 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 넌 치밀하고
고 완벽주의자고 빈틈이 없지. 맞아 나는 불량품
이야, 그래서 여기 가슴의 통증이 지워지지 않아서
아픈데 넌 아무렇지 않다고 하니까
내게 보여 준 것은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여전하군, 같은 말을 반복하는 버릇, 우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면 넌 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진심이라.....진심은 이상주의자들의 자기변
명에 불과할 뿐 현실은 냉혹하고 비참하지
지금 네 모습처럼.....아직도 모르겠어
날 가르치려할수록 너만 힘들어진다는 것을...".


민철이 약간 역정을 냈으므로 수석 연구원 지석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다. 미안하다.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서로 다른 방향을 가고 있는 지금
널 불편하게 했다면 용서해라 민철아!!


수석 연구원 지석은 자신의 심중의 말은 끝내 숨겨 놓고 민철을 바라 보았다.




"진작 이렇게 나왔다면 이 고생 안해도 될 일을!
그만...관두자!!! 이제 날 보자고 한 용건이나
말하지 그래.... 내가 바라는 것이 뭔지....".



"권박사님 소식, 소식을 알고 싶다. 부모님에
대한 면회도 거부된 마당에....권박사님의 소식을 알려줄리 만무하겠지만 소식을 알고 싶어....
그것이 안된다면 이 편지라도 전해주기 바래 꼭 좀....
내용을 분명 네가 확인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어....나에 대한 안부....외국에
나가 있는 권박사님의 가족들은....연세를
생각하면....내 부모님과 같이 너무도 걱정 되니까...."


수석연구원 지석은 민철이 연민의 정조차 없는 냉혈한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반응은 자신의 예상한 대로였다.


"감동적이군 ㅎ
권박사 소식, 가족들...그렇지 기러기아빠
로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닌 분이시지!!
현지 대사관에 억류 시킨 가족들은 조만간
국내 송환 절차에 들어갈테고...권박사는
최고의 핫 이슈메이커로 방송계와 지면을
장식했으니 염려는 무의미 할테고....
눈물 콧물 짜는 편지ok!! 전해 주도록 하지!!
편지 정도야 못 들어 줄 만큼 우리 우정이
그 정도까지 삭막하지 않으니까!! 까짓것 좋았어!!



수석 연구원 지석의 얼굴빛은 순간 어두워졌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고 그런 지석의 얼굴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차전무, 차민철의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 보려는 눈빛 또한 이글 거리며 불타 올랐다.
두사람의 한 치의 양보없는 팽팽한 신경전,
하지만 민철은 모르고 있었다.
수석연구원 지석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고 믿은 그가 반전을 제공하게 되는 장본인임을 끝내 알 수 없었다. 인생이란 새옹지마라 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순환의 고리속을 돌 뿐.......,

















'그래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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