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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예찬

내가있음에 IP : 591ed6ce9dca567 날짜 : 2008-10-21 14:57 조회 : 6249 본문+댓글추천 : 0

오늘도 부랴부랴 짐을 꾸린다.
왼 손과 오른 어깨만으로도 너끈하던 간결한 짐은
‘편리’라는 몹쓸 놈을 모티브로 하나 둘 불어나
언제부터인가 양 손, 양 어깨로도 벅찰 지경이다.
정작 낚시에 꼭 필요한 액기스는 채 4할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하나같이 불편을 -어쩌면 고난이랄 수도 있을-
해소코자 한 것들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집 안에 앉은 냥 편안한 낚시를 하고자 하는 내 욕심이 빗어낸 결과이리라.
여기서 나는, 하나의 편리는 하나의 불편을 낳는 삶의 균형을 깨닫는다.

투덜투덜
어김없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내 앞에서
이 날을 위해 한 주 동안 행해온 청소며 설거지며 심지어는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려온
멀고도 험한 아부는 일순 아무런 효능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는 낚시에 있어서 내가 밑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조건 ‘미안하다’는 반복의 사과와 함께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애매한 뉘앙스만이 그나마 위기에 도움이 될 뿐이다.
무엇을 막론하고 ‘관심’의 밑바탕은 ‘애정’이라 가정할 때
지금의 이 핀잔은 내게 있어 낚시만큼이나 기분 좋은 것이다.

요즈음 트렌드에 비추어 뒤져도 한참을 뒤지는 내 낚시 대.
금전적 가치의 가벼움은 말 할 것도 없고
자태라고 해봐야 그저 기본 형태만 갖추었을 뿐이다.
하지만,
연질이다 경질이다, 편심이 유다 무다 그런 잡다한 퀄리티와 연관 짓기에는
이미 나는 이 녀석들과 너무 친숙해져 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도, 혼자라는 고독감도, 밀려오는 잠에 굴해 깜빡 졸 때에도
언제나 이들은 한마디 불평 없이 함께 해 주었고 내 앞에서 나를 지켜 주었다.
이방의 불청객에게 부리는 새벽 찬이슬의 텃세에도 내 온 몸 적셔
당당히 뻗어 있는 그들을 보노라면 내 어찌 이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리요.

특별히 손질해 주는 것도 없다.
그렇다고 낚시에 있어 주 논의 대상도 못된다.
그럼에도, 제 배 위에 나를 앉히고 하룻저녁 안락을 제공하는 의자의 희생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소금 실은 당나귀의 잔재주란 걸 모른다.
낚시에 방해될까 간혹 뱉는 조심스런 삐걱임은 고통의 호소란 걸 알지만 어쩌겠니 잘 버티어다오.

오직 물에서만 자립하며 오랜 시간 제자리를 유지하는 정중동 찌에게서 ‘일관’과 ‘인내’를 배운다.
세상에 그 무엇이 있어 너처럼 빼어난 몸매를 지녔을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모름지기 ‘빼어남’이란 쉬이 드러내거나 겉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
물 속에 꼭 꼭 숨겨 자주 보여 주지 않음이 늘 안타깝지만
어쩌면 그것이 수십년 많은 이로부터 너를 흠모하게 만드는 롱런의 이유인지도 모르겠구나.
깊은 잠 후 느린 기지개를 펴듯 너의 느긋한 기상은 내게 있어 낚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내 사랑하는 국토에 흠집을 내어 미안하구나.
그래도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작은 그늘이 필요하니 따끔해도 참아다오.
삼겹살 불판에도 나름의 영역이 있듯이 낚시터에도 나만의 영역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표시하는 대표적인 도구가 파라솔이 아닐까.
햇빛을 피하고 비를 막아주고... 자신을 희생해 나를 지켜 주는 몇 안 되는 도구이다.
한 평 남짓 다각형
그 아늑함 속에서 나는 한없는 자유를 누린다.

봉돌, 바늘, 줄, 케미라이트... 심지어 쓰다만 옥수수 한 알까지도
내 손 때가 묻었기에 어느 것 하나 정감 가지 않는 것이 없고
그것은 잘났건 못났건 오래토록 변함없이 나와 함께 할 것이다.

낚시 문화를 부각코자 다른 문화를 비하하자면 -결코 낚시의 막연한 합리화가 아닌-
한 잔 술은 내 용렬한 삶에 푸념을 뱉게 하고
한 모금 담배는 스물스물 내 시야만 가릴 뿐이다.
도박은 확실한 것으로 불확실한 것에 투자하는 것이며
스포츠는 움직이기 싫어하는 자들이 움직일 이유를 만들어 억지로 움직이는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새벽을 여는 낚시가들이여!
그 누가 스스로 자초하는 고독의 참맛을 알 것이며
밤 새 아무것도 손에 쥐어 지지 않는 인내의 환희를 이해할 것인가.
단지 도착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무의미하듯
오직 잡기 위해 행하는 낚시 또한 무의미하다 할 것이니
하나 하나의 과정에 감사하고 즐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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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파로호멋쟁이 08-10-21 17:42 IP : e940957d8171f07
청산은 묵묵하고 녹수는 잔잔한데.... 꾼이 물가를 지나니 낚시를 피하기가 어렵도다


월척캠페인: 오분만 청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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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무워리 08-10-21 18:17 IP : 87384da8bded4e8
대단히 공감가는 글입니다..

한편의 시조같습니다..
추천 0

3등! 핏플1 08-10-21 18:23 IP : 4873f1291df83ab
요즈음 트렌드에 비추어 뒤져도 한참을 뒤지는 내 낚시 대.
금전적 가치의 가벼움은 말 할 것도 없고
자태라고 해봐야 그저 기본 형태만 갖추었을 뿐이다.
하지만,
연질이다 경질이다, 편심이 유다 무다 그런 잡다한 퀄리티와 연관 짓기에는
이미 나는 이 녀석들과 너무 친숙해져 버렸다.


요부분에서 아주 공감합니다 ㅎㅎㅎㅎㅎ
저도 그런 낚시대로 대한번 안부러 터리고 고기 무지하게 잡았어요 잉어 향어 붕어 안가리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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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데이 08-10-23 18:44 IP : 80b62a6b85fa919
공감과 감동이 있는것 같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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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사촌 08-11-09 22:55 IP : d76059b9d75d44e
형님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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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바다 09-02-14 04:50 IP : 7e8746729f47669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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