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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들녘,메꽃 닮은 그 아이

구름이흘러가는곳 IP : 51d2758ce65332f 날짜 : 2022-11-22 03:04 조회 : 5173 본문+댓글추천 : 14

메꽃을 아시나요?
6월 하순, 여름에 접어드는 시기가 되면 길가 풀숲에서 흔하게 볼 수있는 들꽃이죠.
여린 분홍빛의 나팔꽃을 닮은 순정한 꽃.
줄기는 넝쿨을 이루어 뻗어나가며 한 두송이의 개별적 개체가 있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여러개체가 어우러져 군락을 이룬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여름 이꽃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푸른 방초가 넓게 펼쳐져 자라는 하천변의 풀 밭 위를 한마리 야생마 처럼 달리던 소녀.
바람에 날리던 길고 검은 머리결, 쭉 뻗은 늘씬한 팔다리, 크고 깊은 눈, 그 눈가에 어리던 서늘한 외로움의 빛.
벌써 50년 세월이 지난 먼 기억속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빤희>였어요.
태생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들어온 백인 계통의 혼혈아였죠.
나하고 동갑내기였는데 안양천 뱀쇠다리 건너 판잣집에서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꺽다리 홀아비와 함께 살았어요.
들리는 말로는 홀아비의 여동생이 미군과 연애하여 낳았다는데 그 여동생이 죽었다나 어쨋다나 해서 홀아비가 데려다 키우는 거라 했죠.
그집에는 두사람 외에 빤희와 함께 데려온<미니> 라는 새까맣고 비쩍마른 흑인 혼혈아가 함께 살았는데 여섯살박이 그애는 앞을 못보는 장님이었어요.

빤희는 내가 10살이던 71년 봄에 우리 동네로 와서 2년을 넘게 살다가 73년 초가을에 떠났습니다.
내가 다니던 서울구로국민학교에 전학을 했으나 특이한 생김새와 백치 같은 성격으로 따돌림을 당해 한학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던 빤희는 앞 못보는 동생을 돌보거나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앞 안양천의 방초 푸른 벌판에서 혼자 뛰놀며 지냈습니다.
벌판 풀 숲에는 까쭉새,낄룩이,때까치,종달이등의 새집이 많았고 그곳에서 자라 나온 어린새들은 우리 조무래기들에게 선망의 대상 이었습니다.
늦 봄 풀밭에서 어린새들이 날면 죽어라 쫒았습니다.
잠시 앉았다 날기를 반복했는데 그 나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대가리를 풀숲에 처 박으면 낚아채곤 했지요.
새끼새를 잡았을 때의 경이로움은 놀라운 것이었어요.
손아귀에 쥐어지는 생명이 있는것의 따스한 체온,보드라운 깃털과 도릿한 눈.삐약소리...
하지만 어리다고 해도 새를 잡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새끼새 중에서 선호도가 가장 높은 새는 까쭉새(할미새)였는데 얕 볼 대상이 아니었죠.
지구력이 좋아 한참을 나는데 쫒다보면 힘이 들어 중도에 포기하기 일쑤였죠.
우리들 중에서 새잡이의 명수는 빤희였어요.
새를 따라 달리던 길고 튼튼한 다리.
바람에 나부끼던 검은 머릿결.
내가 저물녘 까지 새를 쫒다가 지쳐서 낙담한 얼굴로 돌아서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당겨 새 한마리를 가만히 쥐어주곤 했습니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웃던 그아이의 깊은 눈빛,뱀쇠마을 뒷산으로 분홍빛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던 봄의 노을,짙어가는 방초의 향기.
참... 가슴 따뜻하고 애닯은 기억입니다.

빤희네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길에는 한여름에 분홍색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풀숲에 얽혔는데 그게 다 메꽃이었어요.
빤희는 미니와 둘이서 메꽃을 따서 강아지를 부르듯 꽃을 놀렸는데 신기하게 그럴 때 마다 작고 까만 점 같은 벌레가 꽃 술에서 기어나왔지요.
앞을 못보는 미니는 지언니의 말에 따라 손뼉을 치며 좋아라 좋아라 웃곤 했습니다.
봄이면 메꽃이 피기전에 빤희네 집앞의 흙둔덕을 파헤쳐 메뿌리를 캐서 밥에 쪄 먹었는데 달착지근한 맛이 지금도 입가에 맴 돕니다.

빤희는 들판에서 놀기 좋아하는 나를 유독 따랐는데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참 많이도 쥐어 박고 더럽다고 발길질을 해댔던 기억이 납니다.
잘 대해 줄껄....
왜 그리도 모질게 구박을 했을까....
그 큰눈에 어리던 야속함과 눈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73년 여름에 큰 장마가 져서 물난리가 났지요.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에다 하류 한강의 역류로 안양천 변 판자집들은 대부분 물에 잠겼습니다.
비가 그친 어느 아침 동네사람들이 하천둑에 올라 물구경을 할 때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꺽다리 홀아비가 엄청나게 불어난 하천 건너편을 보고 울부짖었습니다.
빤희는 다행히 고척교 아래 움막 양아치들과 지내느라 무사했지만 미니는 집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눈이 뒤집힌 홀아비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건너편의 지붕만 남은 집을 바라고 격랑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한 10여미터 쯤 갔을까 떠내려온 큰 나무둥치에 부딪혀서 홀아비는 떠밀려 내려가다가 잠깐 솟구쳐 뭐라고 큰소리로 외치고는 이내 잠겨 버렸습니다.

홀아비의 시체는 며칠후 물이 빠졌을 때 동립산업앞 경인선 철로의 교각밑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물에 불어 비대해지고 파랗게 변한 몸뚱이에 꼬리가 달린 하얀 구더기가 기어다니던 참혹한 모습이었죠.
미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빤희네 집은 집터만 남기고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거처 할 곳이 없어진 빤희는 동네 사람들의 배려로 수리조합 관사에 임시로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빤희는 더욱 말 수가 적어졌고 더위가 물러간 안양천 벌판에서 혼자 돌아 다니는것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관사엔 거의 들어 오지 않고 고척동 양아치들의 움막에서 지내는 눈치였습니다.

가을의 초입, 여름 매미가 사라진 동네 버드나무에 가을 쓰르라미의 울움소리가 한창이던 어느 일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군용짚차가 안양천 둑위의 구멍가게 앞에 멈춰 서있고 군복을 입은 사람과 동네 통장이 차 밖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조수석에는 작은 가방을 든 빤희가 앉아있고 통장집 아주머니가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습니다.
두리번 거리던 빤희는 나를 발견하고 곧장 내게로 왔습니다.

그애가 나에게 건내준 것은 작은 목걸이 였습니다.
투명한 하트모양의 플라스틱안에 에델바이스 꽃송이가 들어 있던 장신구 였는데 아마 그게 그아이가 가장 아끼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내 손을 잡고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잠깐 웃어준 빤희는 뽀얀 흙먼지를 남기며 짚차와 함께 멀어졌습니다.

빤희가 떠난 후 그 다음해 여름.
빤희네 집 주변의 풀 숲에는 어김없이 메꽃이 피어나 풀숲 가득 분홍색 꽃너울이 졌습니다.
벌써 50년 이나 지난 먼 옛이야기네요.
자라면서 이사 다니고 기억마져 희미해져 가는 동안 그애가 준 선물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습니다.
뭐 아쉽거나 아깝지는 않습니다.
사는 과정이 다 그러니까요.
하지만 해마다 여름이 오고 메꽃을 보면 생각납니다.
내 친구 빤희는 잘 살고있는지...
힘든 삶의 곡절을 많이 겪지 않고 메꽃 같은 질긴 생명력으로 분홍빛 따뜻한 삶의 온기에 싸여 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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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13

1등! 노지사랑™ 22-11-22 06:37 IP : 3797ee28775ee7d
아련한 추억 이야기군요.

메꽃은 참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죠.
생명력이 강한 식물들은 그시절 구황작물로도 활용되어 배고픔을 달래주기도 했지요.
추천 0

2등! 꾼들의낙원 22-11-22 06:41 IP : 668ec65173891d9
잘 읽었습니다.
구름이흘러가는곳님
묘사와 표현이 굉장한 흡인력을 지닌 문체인 것을 보아
님은 분명 글을 사랑해 오신분 ㅎㅎ

메꽃이 나팔꽃과 헷갈리죠. 자주색으로 선명하고 짙은 것은 나팔꽃, 연한색의 메꽃은 그러나 생명력이 무쟈게 강합니다. 땅을 파보면 백색의 뿌리가 지천으로 뻗어있어 캐내어도 캐내어도 돌아서면 되살아나지요 ^^

모든 잡초나 풀꽃이 그러하겠지만요~
유년의 기억속에 있는 그 분도 어느 하늘 아래서 옛추억에 잠겨 계시면 좋겠네요.
추천 1

3등! 콩나물해장 22-11-22 07:32 IP : ae16d5105158846
단편소설 한편을 읽은것같네요
소나기처럼
아련한추억 잘읽었습니다.
친구분께서도 건강하고 행복히 잘 살고 있을겁니다.
추천 0

엄따거 22-11-22 08:34 IP : de3d251e4496fce
아침 출근..
반복적인 업무를 잠시 미루고 대문을 열고 차분히 읽으며
님의 메꽃 추억에 저도 빠졌습니다.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추천 0

두지원 22-11-22 10:32 IP : 238175f4c5ee3db
글쓴이도...

오래전 헤어진 그 친구도...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추천 0

새벽정신 22-11-22 10:37 IP : b4604aa902669bd
저리 예쁜꽃에 그리 슬픈사연이 담겼네요

아마 행복하게 잘 살고계시겠죠
추천 0

과연육자 22-11-22 11:35 IP : 602672ecb71e4c8
아스라히 가난과 여운 그리고 잊혀지지않은 흑백 사진처럼 가슴에 아린 추억들을 다들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 추억과 상처가 아름 아름 추억의 깃을 이룰거라 생각이 듭니다.

좋은곳에서 그 안양천을 그 빤희님도 기억하실런지,,,,....
추천 0

고지비 22-11-22 12:34 IP : 1960364a73a4f45
가슴아린 추억을 간직하셨네요
다 읽고나니 코끝이 아려옵니다
떠난님 보낸님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추천 0

여울사랑 22-11-22 13:21 IP : 78a46b2dde96720
메 꽃 뿌리 밥 할 때 함께해서 먹으면 포근포근 맛나죠
추천 0

므이쉬킨 22-11-22 16:38 IP : ad6dd309d599e3e
월척은 참 대단한 사이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왠지 오래 전 비슷한 추억이라도 있었던 듯 잠시 몰입되어 있었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