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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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황금 저수지의 조행(1)

입질!기다림. IP : 7547d073aa11ca2 날짜 : 2004-12-02 14:25 조회 : 7368 본문+댓글추천 : 0

새벽은 산골짜기 나무숲의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오고 있었다.
어젯밤 숙취의 여운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파카를 걸치고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추운 한기를 느꼈지만 공기는 무척 맑고 투명한 느낌이었다.
새벽풍경은 안개의 바다 속에 흐릿한 물체의 실루엣만 인지의 공간에 그저 두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 길을 한참 걸었더니 머플러를 두른 목에는 땀이 흘렀다.
시멘트 길을 벗어나 비포장 된 길을 걸어 개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들었다.
한국 춘란의 자생지로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처녀지에 명품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엽예품이 가끔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김화백의 난실에서 직접 확인을 할 수가 있었다.
잡지에서 사진으로 접하던 화려한 자태의 중투와 힘 있게 들어간 황호의 모습, 통통하고 탄력성이 있어 보이는 단엽 화분들을 실물로 감상할 수가 있었다.
갑자기 중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무림의 고수를 생각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시골구석에 은둔하며, 작품의 세계에 몰입하는 무명 화가의 난실에서 한국 춘란의 명품 가능성이 충분한 몇 백분이 성장을 하고 있었다.
혼자만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과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세속적인 생각에 빠졌다.
모든 가치와 기준이 돈으로 측정되는 세상에 춘란 잡지사에 한 통의 전화만 넣어 준다면 이 시골의 산자락은 초토화 될 것이다.
그 잡지는 특종을 했다고 김화백의 소장란 사진과 기사를 검은 활자로 박을 것이다.
이 잡지 기사로 인해 한국의 춘란 동호인들의 관심은 이 시골구석에 집중될 것이다.
단엽은 키가 작고 앙증맞게 귀여운 모습 이었다.
김화백의 란에 대한 설명에 문외한인 내 생각에는 그냥 자생하는 풀포기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애란인 들은 고상한 난에 많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깊은 뜻이 함축되어 담겨 있는 줄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담장이 없는 산자락 아래에 지어진 살림집과 화실의 둘레에 자연 상태 에서 온통 춘란이 자라는 걸 볼 수가 있었다.
난실에서 단엽종 산지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낚시꾼의 귀가 확 뚫리며 심장을 때리는 이야기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새벽 산책 코스를 잡은 것이었다.
김화백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고 했었다.
처음 낯선 곳에 와서 계단식으로 형성된 논에 가을의 황금빛 들녘 풍경을 보았고, 마을을 덮고 있는 잘 익은 감나무의 홍시에 반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어느 해부터 계단식 논에는 대추나무, 복숭아나무가 식재되었고, 벼농사가 없어졌다.
정착의 첫 번째 이유였던 황금빛의 여유롭던 들판을 잃어 버렸다고 했다.
젊은 사람의 이농으로 산 아래 마을은 여남은 가구 밖에 남지 않았고, 전답들은 묵혀진 채 잡초로 우거져 있다고 했다.
시골은 조상대대로 벼농사로 일관되어 내려 왔기에 골짜기 마다 크고 작은 저수지가 남아있지만, 논농사를 위한 기능을 상실한 채 그저 물이 담겨 넘치면 무너미를 통해 사시사철 개울로 물을 흘려 내린다고 했다.
기능을 잃은 묵혀진 저수지 주변이 김화백의 작품 활동에 여유와 생기를 불어넣는 채란활동의 무대이며 애란인 들이 꿈에 그리는 단엽 농장이라고 했다.
동상이몽이랄까 내게는 단엽 농장보다는, 세월의 나이테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미지의 숫처녀 저수지와 월척붕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안개의 미세한 분말 사이로 포플러 나무의 군락들이 망막에 맺혔다.
몇 십년이 되었는지 수령 짐작을 할 수 없지만 하늘을 받히고 서 있는 늠름한 모습이었다.
2010년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는 캐나다 휘슬러 리조트에 가기 위해 만년설이 덮인 산을 바라보며 달리다가가, 쉬다 간 샤논 폭포 아래에 서 있던 나무들의 군락과 개울에 쓰러져 이끼 옷을 입은 대형 통나무들이 갑자기 생각났다.
처녀지에는 부드럽고 감촉에 민감한 유두의 떨림처럼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포플러나무와 낙엽송, 소나무의 군락 속에 약 1200여 평의 저수지 수면은 바람 한 점이 없는 대지위에 누워 달콤한 새벽 단잠에 빠져 있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담배 한 모금을 삼키며 저수지 둑에 서서 상류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산자락 아래와 수면사이 경계 부분에는 억새풀이 자욱했고, 저수지 중심 부분에 큰 고기가 뛰고 있었다.
안개 사이로 둥근 모양의 물 파장이 일어나 저수지 가장자리로 퍼져 나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설렘과 흥분 속에 서서히 상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김화백이 말하는 한국최고의 단엽 농장이 내게는 멋진 황금저수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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