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지금은 고인이 되신)과 후배, 그리고 저
이 세 사람이 10월 말 정도에 길가에 소담스럽게 자리한 소류지(3천 평 남짓)로 낚시를 갔겠죠.
오후 낮낚시로 미끼는 지렁이와 떡밥을 썼을 테니 5치~8치 정도로 열댓 마리 정도씩은 낚았을 테고요.
낚시를 마치고 근처 양탕전문식당으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노곤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밭벼 추수가 끝난 다랑치논(작은 규모의 논)을 가로질러 뱜이 한 마리 지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쭈! 저 식히 봐라. 인사도 없이 지나간다."
제가 괜히 오버를 하면서 뱜에게 뛰어갔지요.
근데, 이 촤식이 무자치나 꽃뱜이 아니라 살모사인 거여요.
그것도 잔챙이가 아니라, 길이로 보나 굵기로 보나 제법 연식이 들어보이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엄마야! 이러믄서 바지에 오줌까지 싸면서 도망을 갈 테지만, 워낙에 어릴 적부터 <땅꾼쩜씨오쩜케이알> 이었던 저에겐,
오히려 역으로 '나 선수그등' 하면서 뱜 앞에 짝다리를 짚고 요렇게 능청을 부리며 능글맞은 미소로 팔짱을 끼고 오른손은 또 엄지와 검지를 벌려 턱에 놓고...
이 뱜을 어찌할까.
집으로 모시고 갈까.
꼬랑지를 잡아 공중삼회전 비틀어떨어지기 5회전을 시킬까 고민 중이였습죠.
전 몰랐었어요.
생명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철칙인 그 형님이 저를 노려보고 계시다는 것을요.
제가 그나마 그 형님 낚시사부라 말을 못하셨지, 자기 후배였다면 바로 <야 시키야! 그냥 안 놔주냐.> 했었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형님의 눈총을 받고 뱜 꼬리만 살짝 잡아 뱜에게 겁을 준 뒤,
"너, 저 형님 때문에 살아돌아가는 줄 알아!" 이러고 그냥 보내줬드랬습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였습지요.
주린 내장을 채우러 식당으로 들어가 물수건으로 꾀죄죄한 몽타쥬를 닦는데, 아 글쎄 아까 뱜을 잡았던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서 뱜 노린내가 폴폴 나는 거 있죠.
물수건으로 닦고 또 닦고 또 닦았어도 뱜 특유의 노린내는 가시지 않고, 탕에 말았던 밥을 한 숟갈씩 뜰 때 마다 뱜 냄새를 맡으니
나중엔 속이 괜히 메스껍고 화장실 가고 싶고, 으앙! 하고 울어버릴까 하다가 간신히 꾹꾹 참고 밥을 먹었더랬습니다. ㅡ,.ㅡ;
비암 하니 옛 생각이 나네요
어릴적 초등 6학년때 가을 10월 1일 그 당시는 겨울에 땔 나무를 해야 할 때 입니다
어머니께서 산에 가셔서 나무를 하고 내려 오시다 발목에 뱜이
물어 가을, 겨울,그리고 봄 까정 고생 하신 생각하면 난 그대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릴때 기억을 더듬으면 누가 그러데요 뱜에게 물린 곳은 개구리를 짓이겨 붙이면
개구리가 뱜 독을 빨아내어 쉽게 낳는다고 하데예
그소리를 듣고 엄동 설한에 개울가에 나가 얼음 배를 타며 웅덩이에 낙엽을 헤집으며 동면 하고있는
개구리를 잡아 붙여 주었지요 그때 어린 손이 추위에 손과 발이 얼어붙어 발을 동동 구르며 고생한것
생각하면 월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눈앞에서 살아나간 비암은 몇마리 안될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의 병환부위는 봄눈 녹듯서서히 회복되면서
지금은 발목에 수술자국이 80세가된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네요
그때 희생된 개구리에게는 미안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쉽게 낳았어요
후비적 후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