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하행선 103Km지점쯤 강천터널을 지난다..터널을 막 지나면 우측으로 옛날 영동고속도로 구길이 보이면서 조그마한 다리가 보인다..이름이 섬강교인데..
1990년 9월 1일 오후 2시 40분경..
강원여객 직행뻐스 한대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섬강교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승객 28명중 24명이목숨을 앗아간 대형사고 였다..
모두다 애통하고 슬픈일 이였지만 그중 더욱이심중을 울리는 한 사연이 있었으니..
덕수상고 교사인 남편(장재인)을보기위해 홍천의 내면고교 교사인 최영애가 어린아들과 이버스를 타고 있
었다..
사고가나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뭍으로나온 영애는 아들이 안보이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아들을
찾기위해..
장재인과 최영애는 교사부부이지만 남편은 서울에 아내는 홍천으로 발령을 받아 서로 주말에만 만날수있
는 주말부부 였었다..
어느 비오는날 여느때처럼 터미널에서 아내와 아들을 기다리던 장재인에게 청천벽력에 소식이 전해졌다..
한달음에 섬강으로 달려간 장재인은 아내와아들을 찾기위해 보름동안 한숨안자며 보닥불을 밝혀두고는
섬강 구석구석을 헤메인다..
그러나..
사고 오일뒤 아내의 시신이 발견되고 그후 다시 팔일후엔 아들마져 주검으로 재인에앞에 나타나고 만다..
당시 메스컴들에 이들에 이야기가 많이 흘러 나와 눈물짖는사람들이 많았으며 나또한 이 슬픈이야기에 맘
이 숙연해져 있었다..
또 불안한 기분도 들었던게 사실이였다..
경기도여주 고대병원에 아내와 아들을 맏겨두었던 장재인에겐 삶이란 희망이 사라져 버렸었다..
몇일후 고대병원뒤 남한강줄기 외진어느곳에선 전봇대에 목을메어숨진 30대 젊은이가 또한번 메스컴을
울렸다..
그에신원은 장재인..
그는 장문에 글을 남기고 아내와 아들에곁으로 가버린것 이였다..
1990년 9월 1일 오후 2시 40분.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62킬로미터 지점에서 서울행 강원여객 버스가 과속으로 빗길을 질주하다 섬강교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승객 28명 중 24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였습니다.
나도 이 사고를 당시 메스컴을 통해 상세히 전해 들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비보를 듣고 사고현장에 달려든 장재인은 섬강에서 보름동안을 버티며
실종된 아내와 어린 아들이 제발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원했습니다.
사고발생 닷새 뒤에 아내의 주검이 발견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여드레뒤 아들의 주검마저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기다림의 명분은 없었습니다.
보름동안 섬강변을 밝히던 모닥불도 스러졌다.
경기도 여주의 고대병원은 당시 사고에 죽어간 주검들이 안치 되었던 곳입니다.
장재인의 아내와 아들도 이곳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는 80년대 초의 대학시절 공주사범대학의 총 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수배와 투옥 그리고 군 강재징집 등의 이력으로 84년 복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유일한 대응방식으로 시를 썼다.
그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청년시인이었다고 합니다.
그 자신 학보사 기자출신으로 학보사 후배인 최영애와 사귀였고 후일 그들은 결혼을 했습니다.
졸업 후 장재인은 서울 덕수상업고등학교 영어교사, 그의 아내 최영애는 강원도 홍천의 내면 고등학교의 불어교사로 발령되어 이른 바 주말 부부 교사였습니다.
최영애 선생님이 근무한 학교는 강원도의 산골 중에서도 오지에 속한 면소재의 학교로
하루에 버스가 세 번 쯤 들어가는 지역으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된 언저리라 합니다.
주말이 되면 그의 아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나오는데,
군내버스로 메밀꽃 필 무렵의 그 유명한 운두령을 넘어 진부까지 나왔다가 강릉에서 서울행 직행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바로 이 직행버스를 탔다가 불귀의 몸이 된 것입니다.
고려대 여주 병원 바로 뒤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둑을 따라 전신주가 이어지는데 지상에서 약 15도 정도 약간 기울어진 한 전신주에 30대 젊은 남자가 새벽 2시에 목을 매었습니다.
이 애처로운 죽음으로 병원개원이래 최대 인파의 추모객이 다녀갔다 합니다.
“짜잔히도 못난 사람, 죽긴 왜 죽어, 어떻게든 살아보지 않구서....
다들 바보! 바보선생! 이라 넋두리하며 한결같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유언대로 남한강 공원묘지의 한 무덤에 세 주검이 같이 묻혔습니다.
- 故 장재인 교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서내용 중 일부 -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아들의 뒤를 따라 다시 강으로 뛰어 들어갔다는 아내처럼 저도 처자를 따라 떠나려 합니다.
이것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이래 강물을 바라보며 제 마음에 간직해오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행여 살아남아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의 의무감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저희 세
식구가 지닌 쓰라린 사랑의 메시지보다 더 생생한 삶의 경종이 어디 있겠으며, 살아남은 사람들
에게 사랑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생을 초월한 선택이 어찌 소극적인 결심일 수 있겠습니까?
부디 처자를 따라간 저의 죽음을 애통해하지 말 것을 당부 드리며,
저희 세 식구 하늘나라에서의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만남과 행복을 기원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신 분들은 제가 없어도 능히 견딜수 있지만
저희 세 사람은 함께 있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빈곤한 저를 풍요롭게 하던 가없이 고운 아내와 아들이 저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저희 세 식구의 주검은 가운데에 아들, 아들의 왼편에 아내, 오른편에 저의순서로 나란히 관 하나에 묻어주시고, 묘지는 장인어른의 뜻을 존중하여 주십시오.
저와 아내의 결혼반지는 그대로 끼워두시기 바랍니다.
먼 훗날,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 모두 돌아가신후에는 다시 화장하여 강물에 띄워줄 것을 부탁합니다.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더없이 평온하고 즐겁습니다.
-1990년 9월 15일 02시- 장재인
그가 남긴 여려 편의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들풀 / 장재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니고
명예가 명예가 아닌 세상
이름 묻힌 들풀로 살아도 좋다
터럭만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꿋꿋한 들풀로 살아도 좋다.
밞아도 다시 일어서는
용서함의 뿌리로 살아도 좋다
낮에는 해 아래 수고하고
밤에는 별과 쉬며
외로워도
정녕 외롭지 않은
들풀이라야 나는 좋다

평생 서로를 의지해 살아가야 할 내가족들
오늘아침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채 출근하셨는지요
오늘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날마다 눈 들여다 보며
사랑한다 .당신이 늘 고맙다 .네가 내아들이어서 고맙다
네가 내 딸이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표현하십시요
부모가 주는 사랑을 가슴에 담은 아이들은
다른길 가지 않습니다
내가 좀 언쨚은 표정지어도 그녀에게 믿음 줬다면
같이 성내지 않습니다
오늘 퇴근하시면 가슴으로 안아주십시요
아이들이랑 웃으면서 사는 우리가족에게 감사함을 더해보렴니다.
가슴아픈 사연이네요...
가족에 집착한 한 가장의 선택이 죽음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아서 따라간 남편의 아버지의 숭고한 사랑을 확인합니다.
세 가족의 영원한 행복을 빕니다.
제 직장 후배중에서도 예전 대구 지하철화재참사때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잃은 후배가 있었는데요,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참고 견뎠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없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승에서 못다 나눈 사랑을 저승에서는 원없이 나누시길 바랍니다.
두리뭉수리님! 장문의 글을 올리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인연 그리고 정! 참으로 귀한 존재입니다.
다음 세상에서 못다이룬 사랑 영원히 함께 하시길
맞습니다 가족"""이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고귀한것입니다.
두리뭉수리님에 가족에 건강을 기원합니다.
요즘같이 가족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탁갑네요.
지금 야간 근무를 하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집사람과 딸아이와 같이 누워서 꼭 껴안고 자고싶네요.
글중에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왠지모르게 가슴에
와닫네요.(그넘의 돈이 뭔지 주말도 없이 일하고...)
이번 주말은 돈도 좋지만 가족을 데리고 가까운곳에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