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자 주목!!!!
순간 교실안이 숨죽인 듯 조용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일제히 선생님 손으로 향한다.
이게 무었이지요???????............. "삐라"요 !!!!!!!!!
"삐라"를 주으면 우린 어떻하지요.????
네!!~~~ 학교나 가까운 파출소에 같다드려요...참~~잘했어요................
하교길이나 또는 집에서 어디선가 비행기엔진 소리가 들리면 우린 본능적(?)으로 하늘을 처다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삐라"를 남기고 비행기는 지평선 넘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검은 뭉터기가
낙하산 처럼 펴지고 그것이 햇빛에 반사되여 흩어져 내리면 우리 그것을 주으려고 온 동내를 헤집던 시절.
시민들은 갑자기 뿌려진 "삐라"를 들고 신기한 듯 아님 궁금한 듯 처다보곤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궁핍함에 영상매체가 흔치 않던시절 정부의 새로운 정책을 알리는대는 단연
"삐라"가 제 역활을 톡톡이 했던 시절이였습니다.
또한 당시 "불온삐라"는 우리들 사이에선 "삐라"의 용도는 인근 파출소에 반납하여 책받침이나
연필등의 학용품을 받을수있는. 지금으로 말씀드리면 "상품권" 이라 할까.그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있는 물건이 아니였다.
논과밭. 온동네를 헤집고 다니면서 "삐라"를 찿아다녔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그것 또한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치 보물 찿기를 하는 기분이랄까!!ㅎㅎㅎ
요즘에는 일명"삐라"라고 하는 "불온선전물"이 안 보이던데 여러분이나 제가 어렸을때만 해도
동내에 또는 논과 밭 산중에 간간히 있었답니다.
교과서에도 "반공교육"이 있어서 북한군의 얼굴을 빨강색으로 그렸고 뿔도 달려 있었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멸공" "반공.방첩" 이란 단어를 빨간 페인트로 커다랗게 써서 항시 볼수있었던 그 시절...
주로 전봇대.구멍가게.학교 및 동사무소 게시판. 또는 사람의 눈에 많이 띄는 공장 답벼락에...
공산당은 나쁘며 그당시에는 괴뢰군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간첩 식별요령을 알아보면.........
1...이른 아침 산에서 이슬에 젖은 양복을 입고 내려오는 사람.
2...양복과 구두에 흙이 묻은 사람.
3...담배값및 버스 요금을 모르는 사람.
4...한 동안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
5...은연중에 "동무"라는 말을 쓰는 사람.
6...은근히 북을 찬양하는사람. 등등...
사실 이젠 체재의 우열이 판가름 나면서 최소한 남한에서 만큼은 "불온삐라"의 위력이 소멸되지만
그렇다고 bill를 일컷는 일본말에서 유래된 "삐라"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다.
체제와 이념의 갈등으로 점철된 아나로그시대의 "불온선전물"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사라졌다 생각한다.
밤 문화의 거리를 걷다보면 명암크기의 전단지들이 길바닥에 뿌려진걸보고 그 옛날"삐라"의 모습을 떠 올리곤 합니다.
우리말론 "전단"이며 "삐라"의 어원은 bill이 일본말로 "삐라"가 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아시는지요?
최근 우익단체에서 북에 대량 살포 계기로 본 사회학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는 삐라는
"추억의 불량식품"과 비슷한 물건이답니다...
그때를 아십니까?
공중에서 뿌려진 "삐라"를 주으려 해지는줄 모르고 온 산과 들로 헤매던 어린시절을.....
감사합니다^^
- © 1998 ~ 2025 Wolchuck all right reserved. ▲TOP
후방인데도 부대 철조망 근처에 보면 꼭...
60년대 제 초등학교 시절 한달에 아니면
두달에 한번 상영되었던 가설극장 영화 선전용 삐라
확성기에서 카랑 카랑하게
터졌던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어쩌고하며
신작로에 뿌연 먼지 일으키며 뿌렸던 삐라....
그 삐라에 열에 한번도 영화구경을 못 간
가난한 시골어린애였지만 공연히 가슴 두근거렸던
기억은 지금도 아릿하게 가슴을 칩니다
또한장늬 추억입니다 (참희안한추억)
우리동네 화전밭일구어 높은산 위에서 학교 다니는 친구 있었습니다.
이친구 삐라 싣고온 풍선이 터지지 않고 산에 메달려 있는 삐라를 발견하고
매일 두장씩만 가져와서 공책 받아갔죠,
이상하게 생각한 파출소 순경이
다그치자 실토 하고 말았죠.
수천장 삐라를 한꺼번에 가져갔는데
공책 한권도 안주더군요. 앞으로 조심해 카면서요
왜 그때 그랬는지 몰라유(당연히 공책 박스로 줘야 돼는데~)
권형님 소쩍새가 신이 났습니다.
또 추억의 맛있는 밥상을 받고보니 뭐 부터 먹을꼬....
제 고향은 천년고도 경주인데, 삐라보다도 엿먹고 싶어서 방과후면 조무래기 몇이서 괭이 호미 울러 메고
우리밭,남의논 할것 없이 기와조각 케러 다녔습니다.
기와집의 골기와 끝에 등근조각(천년의 미소:빙그레 웃는 모습의 기와 생각나시죠)은
원형이 비교적 형태가 있으면 엿장수가 엿 한반티 다 비워주고 갑니다.
물론 불법이고 논.밭둑을 훼손하는 잘못이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천지도 모르고)
그저 기와조각에 엿장수가 꼼짝 못했던 이유를 커서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길에 소득이 없으면 산(경주남산 자락)이나
반월성,첨성대,계림등 숲 언저리등 바람불어 종이 모이는 곳에 가면
삐라 흔했습니다만, 제 기억으로는 신삐라가 인기 좋았는데(선생님도,순경아저씨도)
우리 또래들은 늘 다른 친구들이 일주일 한달전에 주워온 구 삐라로 공책은 못받았죠.
그래도 공책보다는 아이스케키,엿이 좋았습니다.
남쪽에 좋은일 있으면 권형님께 꼭 전령 보내드리겠습니다.
사단장헬기가 저격 될까봐 대성산 위로는 날지않던 시절의 얘기군요
저주의 땅이라던 악명높던 혹한도 아련히 그리워지니 ....
참 보내주마던 거시기는 아직 유효한거죠 ^^*
반공 방첩......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 들이네요........
새삼 지난 날들을 반추해봅니다.^^*
그때를 아십니까.
애독자 입니다.^^*
늘~건강 하십시요.
그당시 국민학생이 된기분입니다
국민학교 다닐때 대한민국지도를 그리면 남한은 파란색으로 그리고 북한은 붉은색으로 그렸던 것,
교과서에 북한군이 총들고 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는데 그 북한군이 전부 늑대,여우등의
짐승이었던 것도 기억이납니다.
북한군이 아니고 인민군 이었죠.
빨갱이가 더 친숙했구요
요즘도 간첩신고 1000만원 간첩선 3000만원 주는거 맞나요.
그때를 아십니까????----------------------전 모립니다...그때는 너무 어려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