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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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땅꼬마였다. ㅡ 지금은 아니냐, 라고 묻지 말자. 놈
의 자존심을 긁기는 싫다. ㅡ 놈은 국민학교 1학년 때의
몸무게가 17킬로 였고, 고등학교 1학년 때의 키가 147
센티였다. 늘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놈은 명석하
게도,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을 자랑으로 전환했다. 가히
상식의 역전이었다. "나보다 작은놈 나와봐!"
ㅡ 이제부터는 '땅'을 빼고, 놈을 그냥 '꼬마'라고만 부르
기로 하자. 놈의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다. ㅡ
낙엽이 뒹구는 스산한 골목길에서 꼬마는 한 손에 누룽
지를 들고, 개떼처럼 달려드는 인생무상ᆞ삶의 회의에
속수무책 무너지고 있었다. 꼬마는 이쯤에서 파란만장
했던 자기의 긴긴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ᆞ 누나들이 외우는 궁민교육헌장을 엄마 품에서 마스
터하다. 소도시에 소문이 돌고 다섯 살 꼬마, 교장 샘의
초빙으로 전교생을 모아놓고 궁민교육헌장을 선포하다.
자랑찬 녀석!
ᆞ 특채로 성당 유치원에 입학하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딱 내 여자'를 발견하다. 사탕 하나와 현란한
언변으로 '딱 내 여자'를 창고로 유인하다. 입술로 나체
에 도장을 찍고 '지켜 줄게'라고 약속하다. '딱 내 여자'의
손을 잡는 불한당을 연못에 빠트리다. 수녀 원장님께 끌
려 집에 오다. 퇴학당하다. 무정한 세상!
ᆞ 아버지 따라 궁민학교를 여덟 번 전학하다. 친구라고
는 사귀질 못하다. 혼자서 자유롭게 놀다. 불쌍한 녀석!
ᆞ 구멍가게에서 껌 한 통을 훔치다. 묘한 떨림. 양심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이란 걸 미처 모르다. 며칠 후 자수하
다. 멍청한 녀석!
ᆞ 중학생이 되다. 방구를 뀌었다는 모함을 받고 주동자
와 싸우다. 큰놈과 싸운다는 두려움은 곧 희열이 되다.
스스로의 빠름에 몹시 놀라다. 번개 같은 녀석!
ᆞ 진짜 예쁜 가스나를 사귀다. 용돈이 궁해지다. 큰누나
이름으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당첨되다. 경품을 암
거래하다 누나에게 걸려 박살이 나다. 연애도 마음대로
못하는 더러븐 세상!
ᆞ 가스나와 버스 여행을 가다. 버스 안에서 홀짝을 하다.
연짱 16판을 이기고 판을 접다. 울음을 터뜨리는 가스나
를 보며, 예쁜 여자는 머리가 돌일지 모른다는 예감을 하
다. 잔인한 넘!
ᆞ 독서실에서 잘생겼다는 이유로 몰매를 맞다. 히어로
가 맞았다는 소문에 진주 전역의 팬들이 모이다. 패싸움
을 하다. 경찰차 세 대가 오고, 도망치다 체포되어 경찰
서로 이송되다. 수사과에서 아버지께 발각되어 구타 당
하다. 경찰이 사람 잡네!
ᆞ 같은 동네 고3 누나가 자꾸 자기 방에 놀러 오라고 유
혹하지만, 거절하다. 아직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
을 감추다. 순결한 녀석!
자기 역사의 핵심을 요약정리하던 꼬마는 곧 좌절하기
시작했다. 사고만 있고 사건은 없었다. 너무나 평이해
서 '아아... 내 인생은 혁명이 필요해!'라고 생각했다.
꼬마는, 자기가 인생에 관한 열변을 토할 때마다 침을
흘려주던 '땅콩'을 떠올렸다. 녀석은 꼬마가 준 복싱조끼
를 들고 "고마바. 니, 어른 만들어 주까?"라고 말했었다.
땅콩은 야리꼬리한 뭔가를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었
다. 뭘까...
"들어가자."
여관 앞에서 늠름한 포즈와 장중한 음성으로 땅콩이 말
했다.
"야, 니... 미칬나?"
덜컥, 겁이 났다. 시내 중심가 뒷골목의 음산함. 땅콩은
건달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쫘식, 쫄기는. 우리 집이야, 인마."
녀석의 방은 4층 건물 옥상의 컨테이너 박스였다. 벽에
는 장미희와 정윤희가 요염하게 웃고 있었다.
"니... 해봤나?"
"뭐?"
"쫘식, 니... 모르제?"
땅콩이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솔직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발적 굴복 되겠다.
"모른다, 띠바!"
"선택해라. 복도에서 보는 잠망경이 있고, 옆방에서 듣
고 보는 구멍이 있고, 옥상에서 보는 환풍기가 있다."
"다 보믄 안 되나?"
"허~ 이 자식, 밝히기는!"
연애편지 대필을 해주는 대가로 한 달 동안의 교습을 시
작했다.
땅콩에게서 담배를 배웠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담배연기를 콜록이며 어른들의 세상을
엿보았다. 구역질을 했다. 땅콩이 끌끌 혀를 찼다. 분
명 사랑은 아름답다고 했는데, 욕망은 사랑이 아니었다.
한 달 동안, 305호를 드나든 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얼
굴도 있었다. 진실은 추악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보이는 만큼만, 보이지 않는 부분은 구태여.'를 배웠다.
약속한 한 달이 다가오자 아직 순결한 사랑을 목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초조해졌다.
마지막 날, 돼지 같은 여자와 멸치 같은 남자가 들어왔다.
이외수처럼 병색이 완연한 남자를 여자가 씻겨 줬다. 정
성을 다해 남자의 온몸을 씻기던 여자가 소리 없이 울자
남자도 따라 울었다. 침대 위에서 여자는 정성을 다 해
남자를 애무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출렁이는 여자
의 살과 박제 같은 남자의 뼈가 아름다웠다. 결코 혐오스
럽지 않았다. 사랑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들이 가르쳐
주었다.
땅콩과 헤어지고 예쁜 가스나를 뒷동산으로 불러냈다.
"어른이 되고 싶다."
가스나가 눈으로 오솔길을 살피며 종알댔다.
"니 고등학교 졸업할 때 뽀뽀하고, 니 대학교 입학할 때
키스하고, 니 군대 갈 때..."
"씨잘 때기 없는 소리 할 거면 헤어지자."
"니 와이 카노?"
"살불살조살부살모(殺佛殺祖殺父殺母)."
"그기 믄데?"
"알을 깨는 기다. 알!"
뒷동산을 내려오며 꼬마는 묘한 해방감에 팔을 휘휘 , 저
었다.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야, 더 이상 꼬마가 아니라고!"
그 순간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시간이 언젠가 파도처
럼 철썩인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꼬마는 자꾸만 휘휘,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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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기엔 넘 많이 온것같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