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의 기억 속에서 겨울밤과 비를 가져옵니다.
넓은 마당과 작은 숲, 기와집과 돌담이 필요하군요.
서른다섯 살의 사내가 창 넓은 방에서 이쪽을 보며 혼자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빵모자를 쓰고 있군요. 표정이 조금 어둡네요.
상 위에 술잔이 두 개인 걸로 봐서 혼자는 아닌 것 같은데...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새벽 한 시를 가리킵니다.
열린 대문으로 껑충 키 큰 남자가 들어섭니다.
사내가 일어나서 나오는군요.
둘이서 악수를 합니다.
"와라... 2년 만이냐?"
"형, 잘 있었수? 모자는 여전하네?"
사내의 목소리는 가라앉았고, 키 큰 사내는 톤이 높습니다.
둘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군요. 창문으로 건배하는 게 보입니다.
무슨 말인가 나누는데... 들리지가 않네요.
들어가 봅시다.
"절 밥은 먹을 만하디?"
"밥이야 뭐 먹어도 그만, 굶어도 그만. 공부만 했수..."
"그거 해서 먹고 사냐? 와서 현장 일이나 하지?"
"사주 그거 우습게 보지 마슈! 통계학이지 미신 아니유."
"글쎄. 난 믿지 않으니..."
"형이야 고집으로 안 믿는 거고... 하튼 밥은 먹고 사우."
후배가 방을 빙~ 둘러보는군요. 그러다 눈을 감습니다.
한참을 후배는 그렇게 있고, 사내는 술만 마십니다.
눈을 뜬 후배가 사내를 건너다보고, 사내는 차갑게 한마디 합니다.
"내 앞에서 그러지 말랬지?"
"형, 아직도 그렇지? 내가 하자는 대로 합시다."
이젠 사내가 눈을 감아버리는군요.
후배가 창밖을 봅니다.
문득 후배가 밖으로 나가고, 사내는 다시 술을 마십니다.
창밖으로 후배의 등이 보이고, 그 너머로 감나무가 보입니다.
마당의 작은 숲에 새벽 비가 내리는군요.
후배가 다시 들어와 창쪽으로 서서 밖을 봅니다.
"이리 와서 술이나 마셔!"
사내가 약간은 짜증 난 목소리로 후배를 부르는군요.
"형, 아버님이 어떻게 생겼어요?"
"또 왜? 난 그런 거 안 믿는댔지? 이리 와서 술이나 마셔!"
사내가 화를 내기 시작하는군요.
후배가 돌아섭니다.
"형, 내가 말해 볼까? 형은 아버지 안 닮았지?"
"그래 인마! 좋아, 니가 말해 봐. 뭘 말하고 싶은데?"
분위기가 더러워지네요. 암튼 저 자식 성질머리하고는...
"형, 아버님이 저기 계셔. 감나무 밑에서 여기를 보고 있어."
"웃기고 있네... 그래? 그럼 말해봐. 어떻게 생겼냐?"
사내가 술을 털어 넣으며 빈정대는군요. 눈빛이 차가워졌네요.
"이마가 넓고, 콧날이 날카롭고, 쌍꺼풀진 큰 눈, 꼭 다문 입..."
사내가 흘깃 후배를 봅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디서 아버지 사진 봤냐? 비슷하긴 하다만..."
"감색 양복에... 단단한 어깨..."
'감색 양복'이란 말에 사내가 잔을 놓습니다. 손이 떨립니다.
"너, 정말이냐? 정말 넌 볼 수 있냐? 정말 와 계시냐?"
후배가 다시 창밖을 봅니다. 사내가 옆에 섭니다.
감나무 밑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빗방울이 조각나고 있습니다.
"근데요, 옆에 남자아이는 누굴까? 손을 꼭 잡고 있네?"
사내의 눈이 커집니다. 목에 소름이 돋는군요.
"가만히 이쪽을 보고만 있어요. 슬픈 눈빛이다..."
사내는 아무리 얼굴을 가까이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가신다... 꼬마가 돌아보네."
"꼬마가 돌아봐?"
서른다섯 살의 사내가 괴로운 듯 술병을 듭니다.
마주 보고 앉아서 술을 마십니다.
한동안 침묵합니다.
"형, 이젠 제사 지내요. 아버님은 돌아가신 거야."
"그럴 수는 없다. 살아 계실 거야. 니가 잘못 본 거야."
"내가 본 게 맞수. 형 이러는 거 불효야. 돌아가신 거 맞아요."
"아니, 찾을 만큼 찾았지만, 그래도 기다린다."
"벌써 10년째라메? 오셨으면 벌써 오셨어요. 이젠..."
"아버진 나하곤 달라.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니야."
"꼬마는 누굴까? 형은 알지요?"
사내가 아무 말이 없군요. 또 한 잔을 마십니다.
"누구 죽은 사람 있었수? 형제 중에?"
사내가 술잔을 탁! 놓고 창밖을 봅니다. 멍한 표정입니다.
"동생이 있었다. 바로 아래 동생. 태어난 지 육 일 만에..."
"어쩌다가? 그냥은 아닌데? 말해봐요."
"그만하자. 술이나 마시자."
"형이 싫다면, 내가 할 거요. 내가 볼 때는 형 비틀대는 거 이유 있어."
"건방진 소리!"
"아버지하고 동생, 절에다 모셔요. 이젠 정리해요. 응?"
"좀만, 좀만 더 기다려보고... 제사를 지낼 때는 말하마."
"아버진 어쩌다가 그랬수?"
사내, 또 한 잔을 털어 넣고 멍하니 창밖을 봅니다.
"아버진... 내게 실망하신 거야.
사업의 실패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난 알아.
막다른 골목인데, 혼자뿐이었을 거야.
스물다섯 살의 나는 빗나가기만 했었으니까.
내가 아버지를 떠나게 한 거야..."
"동생은요?"
"내가 밟았다. 이불 속에 있는 걸 모르고 밟았어."
사내가 쫓기듯이 또 한 잔을 털어 넣습니다.
"형, 미안해요. 하지만, 잊을 건 잊어야지요."
남자 둘, 취해서 창밖을 봤을 때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작은 숲에 나란히 서서 오줌을 눕니다. 새벽 4십니다.
이젠 들을 이야기도 없겠네요. 우리도 이 방에서 그만 나갑시다.
# epilogue
살아가다 문득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 하고 입속으로 불러 보면,
그러면 나는 가슴 속에서 모래알들이 서걱이는 소리를 듣는다.
이쯤에서 얼른 고개를 들고 눈에 힘써 초점을 잡고,
흠! 흠! 하고 목소리를 다잡고 일상으로 돌아서면 나는 아무렇지 않다.
하지만, 하늘이 곧 울 것처럼 지랄 같거나 한 줌 흙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나는 그 메마른, 메말라서 슬픈, 그래서 아픈
살아온 날의 한 때와 아버지를 기억해 내고는 상처받은 짐승처럼 흔들리는 눈빛이 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빠져들고 말 그 추억의 심연이 두려워 허둥허둥 서성댄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들의 입구, 그 언저리에서...
이쯤에서 나는 멈춘다.
더는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을 만큼 목이 아파 온다.
가슴 속 깊이 유배시켰던 아버지가 어느 가을날의 골목길 위에 서 있다.
감색 양복을 단정히 입고,
말없이 꼭 다문 입매와 냉정한 듯 깊은 눈매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머리칼에 아침 햇살이 반짝인다.
아버지가 돌아서고, 스물네 살의 나,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하며 대문을 닫는다.
찰칵!
오늘,
아버지를 스친 바람 한 줄기가 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내고 무심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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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님이 그동안 쓴 글들을 정독 중 입니다.
필력이 대단하시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공들여 쓰신 글이니 낼 찬차니 읽어 볼께유ᆢ^~^"
지도 심심해유ᆢ^-^;;
집중력 있게 아까 저녁에도 읽었었는데...
어르신.....
분위기 꼭 타시네요....
저두 이제 가끔씩 영화 한편보면은....
눈물이...
머리안좋은 저는이해가...ㅠ
그 이상은 운이 따라야 하는 거지만.
자다가 깨어나 댓댓글 답니다.
체해서 두 끼를 굶었더니 이 새벽에 배가 고프네요.
다시 잠들긴 힘들어 긴 새벽이 되지 싶네요~
관심, 고맙습니다.
때돈벌겠고만
여지것 본것중에 젤 좋네요
사라있었네? 이 빵구똥꾸야~ ^^"
놀랫습니다..
나는 또 그 사내를 바라보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젠 잊을 만도 하건만…
OO, 고마 포기하세요~
닫아 버립니다.
흘리신 말을 다 주워 담을 그릇도 안 되고
아직은 다 하지 못한 말씀도 많은 듯 하고..
글이...
참 오랜 시간 제 가슴에 남아 있으리란
예감만 해 봅니다.